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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없는 시인의 “춘몽”(촛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목돈이 필요없는 사회,필요보다 많은 땅과 집을 가진 사람이 사라지는 사회,그런 사회가 온다면 기꺼이 사회주의의 깃발을 내리렵니다.』
사회주의 혁명가를 자처하면서 「얼굴없는 시인」으로 활동하다 7일 법정에 선 박노해 피고인(33·사노맹 중앙위원).
박피고인은 7일 열린 첫 공판에서 모두진술을 통해 현정치권이 『노동자가 노동자임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해준다면 스스로 사노맹을 해체하겠다』면서 그의 소박한(?) 이상향을 그려나갔다.
고장난 환풍기만 놓여 있는 열악한 작업환경속에서의 노동자생활과 배차시간에 쫓기면서 교통사고위험에 시달려야 하는 버스기사생활 등을 통해 그의 사회주의 사상은 자연스럽게 자라났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모든 폭력을 싸잡아 비난할 수 없는 것이라며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폭력은 정당하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2시간30여분에 걸친 다소 장황한 듯한 그의 모두진술은 때때로 『공소사실과 관계없다』는 검찰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재판부의 양해아래 ▲자신의 사상형성 과정 ▲사노맹 결성배경 ▲안기부 수사과정 등의 순서로 이어졌다.
교통사고와 산업재해,분신과 구속자 숫자,그리고 수도물 오염도가 세계 최하위를 기록하는 사회가 오면 사회주의를 포기하겠다는 그의 진술은 언뜻 「이데올로기는 지식인의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는 말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일견 몽상가의 그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그의 주장은 감수성 예민한 한 시골소년을 「자생적 혁명가」로 키운 우리사회의 각박한 지적 풍토를 되돌아보게 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권영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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