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구호」뒤엔 패륜이…/손봉호교수 서울대사대·철학(특별기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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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폭행
한 나라의 국무총리로 임명된 교수가 학생들에 의해 강의를 중단당하고 계란과 밀가루 세례를 받고 주먹으로 얻어맞고 발길로 차이고 운동장에서 끌려다녔다 한다. 정상적인 마음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자처하는 우리나라에서 일어났고,그것도 시장 뒷골목에서가 아니라 최고학부인 대학교에서 일어났다.
한 국가의 총리가 학생들에 의해 이런 수모를 당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어떻게 하다가 나라의 질서가 이 모양이 되었고,반만년의 문화적 배경을 자랑하는 사회가 이렇게 야만적이 되었는가. 이 사회에서 활동해왔고,이 나라에서 대학생을 가르쳐 왔다는 사실이 실로 부끄럽고 송구스럽다.
○상상할 수 없는일
우리 기성세대는 그동안 민주화와 사회정의를 위한 학생들의 활동을 착잡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한편으로는 학생들이 고치려고 목숨을 걸고 나서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사회를 잘못 만든 것에 대해 연대책임을 져야 했기에 부끄러워 하고,그들의 희생을 안타까워 했으며,다른 한편으로는 학생들이 사용하는 과격한 방법에 대해서는 항상 불안해 했다.
그러나 드러내 놓고 학생들의 잘못을 꾸짖지 못했던 것은 우리들 자신들의 잘못이 너무 많았고 그들이 비판하는 정부와 정치가들의 잘못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생들의 어떤 잘못도 기성세대 일반의 실질적인 비판과 저항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학생들의 철없이 과격한 행동에 대해서는 기성세대에서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정상상황이라면 학생들의 편에 서야할 사람들조차도 점점 더 비판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동안 정부와 정치계가 조금 더 도덕적이었고,공권력이 좀더 지혜롭게 행사되었더라면,그런 변화는 훨씬 더 빨랐을 것이다.
○정당성은 끝났다
역설적으로 정치가들의 잘못에 기생해 과격학생들은 이제까지 거의 모든 횡포를 도덕적 정당성을 가지고 다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시기는 끝나가고 있다. 과거에는 일방적으로 반정부적이었던 사람들이 요즘은 양비론적이 되고 있고,여러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고 또 스스로 끊었는데도,폭력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 계속 자라고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학생들 자신들의 잘못때문이다. 그들의 이상은 그들의 잘못된 방법때문에 퇴색되고 있고,그들의 활동은 건설적이라기보다는 파괴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민주화를 위한 국민전체의 역량을 전적으로 무시한채,자신들의 이상과 도덕적 순결성에 도취해 지나치게 독선적이 되었고 안하무인격이 되었기 때문이다.
○독선과 안하무인
바로 그런 터무니없는 복선이 이번 사건을 일으켰고 이번 사건은 학생운동에 먹칠을 가했다. 거룩한 구호뒤에 어떤 패륜과 비도덕이 숨어있는가를 국민들에게 적나라하게 노출시키고 말았다. 아무리 정부가 하는 일이 잘못되었고,신임총리의 처사가 불만스럽다 하더라도,인간 정원식에게 그런 수모를 가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무엇이고,인간간의 기본적인 예의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공권력의 폭력을 그렇게 미워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야비한 폭력을 행사하고,민족의 자주성을 그렇게 강조하는 자들이 민족적 전통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무례를 저질렀으니 그 얼마나 모순되며 치졸한 행동이었는가. 이번의 비이성적인 행위는 용서받기가 어렵게 되었으며,어떤 궤변을 써서도 국민들의 마음을 돌려놓지는 못할 것이다.
스스로의 무덤을 팠으며,자기들이 그렇게 타도하려는 정부에 가장 큰 도움을 주었다. 이제 기성세대는 이런 철없는 패륜아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고,그들을 비판하는데 아무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한편 정치계와 교육계도 이번 사건을 심각한 자체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나라를 어떻게 다스렸고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쳤기에 시민이 총리를,학생이 교수를 자신들의 손으로 벌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는가. 그리고 정부와 공권력에 대한 신임이 왜 이렇게 떨어졌는가. 이런 권위로서는 사회의 질서를 회복하기 어렵게 되었음이 분명해졌다.
최루탄과 감옥으로 질서를 유지할 수는 없다.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과 권위가 필요하다. 정치가 도덕적이 되고 법집행이 공정할때,비로소 국민들은 정부의 권위를 인정할 것이요,그것은 수많은 경찰과 최루탄이 행사할 수 없는 무서운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런 권위를 회복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으면 자신들과 국민을 위해 빨리 물러나야 할 것이다. 국민은 이런 폭력과 무질서를 견뎌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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