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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병군번 1번 임부택 예비역장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전장에서 청춘을 보냈고 반평생 군에 몸담았던 사람이 모든 가치의 기준을 「애국」에 두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국군 사병군번 1번 임부택 예비역소장(72·해동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 고문)은 자신의 좌우명이 되어버린 「애국」이라는 두 글자가 요즘처럼 설자리를 잃은 적이 없었다며 위기시국을 개탄하고 있다.
지난달 26일 명지대생 강경대군 치사사건이후 잇따른 분신·가두시위·정부의 강경대응 등 어느 하나에도 「나라사랑」의 마음이 깃들여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생각에서다.
고희를 넘긴 시민으로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고 있는 역전의 노장을 만났다.
-강군 사건 이후 한 달이 넘도록 시국불안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한마디로 딱 잘라 얘기하면 모두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 그래요. 재야·학생·정치인 모두가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엔 모두 틀렸어요. 우선 학생들은 이 나라 장래가 그렇게 극단적인 투쟁만으로 과연 밝아질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얼마든지 평화적으로 자기 주장을 펼 수 있을 텐데….
위정자들은 좀더 아량을 베풀 줄 알아야 해요. 강군 사건은 분명히 통치차원에서 큰 잘못인 만큼 그 잘못을 인정하고 보다 실질적인 민주화조치를 계속 해야죠. 제발 이 나라 앞날을 생각해 서로 한 발짝씩만 뒤로 물러서 현 시국을 바라봤으면 합니다.』
-사병군번 1번을 달게된 특별한 사연이라도….
『전남나주에서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짓다가 39년 20세 나이로 일본군 지원병 2기로 입대한게 인연이 됐어요. 해방 후 45년 10월 국방경비대 창설을 준비하기 위한 군간부양성소에 들어가 교관노릇을 했어요. 다음해 2월 국방경비대가 정식 창설되면서 중사계급장을 달고 「110001」 사병군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해 5월 육군사관학교가 문을 열어 1기 입학생이 되는 바람에 사병 군번 「1」번은 3개월여 밖에 달지 못했어요.』
-6·25 때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지휘관으로 압니다만.
『나 혼자 잘 싸워서 승리한게 아니고 부하들이 목숨을 국가에 바친다는 일념으로 뭉쳤기 때문이죠. 50년 7월 충북 음성전투(당시 6사단7연대장)에서 대대병력이 적 1개연대병력을 섬멸한거나 그해 9월 38선을 최선봉에서 돌파한거나 동두천·사창·용문산 전투승리 등 모든게 내조국·내민족을 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바친 젊은 군인들 덕분입니다. 50년10월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초산에서 연대병력이 중공군 1개 군단병력에 포위돼 한달 동안 악전고투했으나 결국 3천여 연대병력 중 절반을 잃은 적도 있습니다.
나이 탓인지 요즘엔 하루에도 몇 번씩 당시 목숨을 잃은 부하들 생각이 나 눈물을 훔치곤 합니다. 하루빨리 통일이 돼 현장에서 부하들 진혼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5·16군사혁명 당시 혁명군 진압명령을 거부하셨다면서요.
『당시 1군 예하 1군단장으로 근무하면서 혁명발생직후 이한림 군사령관과 매그루더 미8군사령관으로부터 진압명령을 받았지요.
혁명군이래야 핵심병력은 4천여명에 불과해 진압은 시간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윤춘근 군부사령관의 내방을 받고 혁명군 진압에 대한 의견을 나눈 결과 군단병력동원시 김일성에게 남침기회를 제공하고 혁명군과의 충돌은 결국 대규모 유혈사대와 함께 국민의 희생을 요구한다는데 뜻이 모아져 진압명령이행을 유보하게 되었죠.』
-명령수행은 군존립에 있어 기본 중의 기본 아닙니까.
『우리의 혁명군진압거부로 혁명은 성공했지만 명령불복종의 죄책감이 더 커 61년3월 자진해 예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후 미국유학을 떠나려 했으나 미8군사령관의 명령불복종이유로 미국행이 무산됐어요.
군인으로서 당시 나 자신의 행동은 비판받아야 마땅합니다만 국가의 존립을 수호하기 위한 공직자로서의 내 행동은 역사가 평가해주리라 믿습니다.
당시 혁명군진압에 군단병력을 동원했다면 반드시 제2의 6·25가 일어났을 겁니다.』
-예편 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재산이라곤 집 한 채 밖에 없어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전축·골프채까지 팔아야 했습니다. 그후 일자리를 얻어 73년까지 한국전력공사·고덕산업주식회사·임성실업주식회사·한일기업대표이사를 거쳤으나 내외사정이 일하기에 썩 내키지 않았어요.
결국 내일을 해보자싶어 80년10월 한국보험공사 연수원손해보험대리점 과정을 수료하고 현재의 보험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84년 당뇨와 고혈압이 있다는 진찰을 받고 40여년을 피워오던 담배를 끊었습니다. 아직은 주일이면 서울근교로 등산을 하고 가끔 퇴역장성모임인 성우회에 나가기도 합니다.』
50년12월 무성을지무공훈장을 시작으로 53년5월 금성충무무공훈장, 62년 3등군무공로훈장에 이르기까지 17개의 각종 훈장을 받은 예비역장군.
모두 5남매를 출가시키고 서울 종암동 단독주택에서 부인 최덕난 여사(71)와 80여만원의 연금으로 생활한다는 그는 『6·25의 6월을 앞두고 모든 국민이 한번쯤 「나라사랑」을 생각해 볼 때』라고 했다. <최형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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