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생계형 노조 … 귀족 노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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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 간부들이 배가 고파 봐야 노동운동을 제대로 알게 될 겁니다."

방용석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은 요즘 노조의 활동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1970~80년대 원풍모방 노조위원장을 지낸 대표적인 노동운동가다. 72년 출범해 82년 전두환 정부의 '정화조치'에 따라 강제해산된 원풍모방 노조는 당시에는 대표적인 강성노조였다.

그 노조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방 이사장은 "그때는 쥐꼬리만한 월급으로는 도저히 먹고 살기 힘들어 노동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며 "지금은 노조 간부들이 배가 불러 국민이 우려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고 혀를 찼다.

노동운동이 '대접'을 받기 시작한 건 87년 민주화운동 이후부터다. 그 이전의 노동운동은 생계형이었다. 그나마 노조가 먹고 살기가 빠듯하던 노동자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말 한마디 잘못 하면 경찰에 끌려가 몰매 맞기 십상이던 권위주의 정권 시절이었다. 노조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유일한 창구였다. 그래서 노조가 파업을 하면 시민들은 그들을 동정했다.

민주노총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선명한 투쟁'을 앞세우면서 순식간에 한국노총을 뛰어넘고 가장 영향력 있는 노조가 됐다. 87년 노동자 대파업 이후 노동계의 파업과 투쟁은 대부분 민주노총이 주도했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렀다. 모든 게 변했다. 민주정부가 들어섰고, 경제도 성장을 거듭했다. 노동자들의 삶도 많이 변했다.

하지만 노조의 행태만큼은 아직도 20년 전 그대로다. 달라진 건 하나 있다. 과거에는 '생계형 노조'였지만 이젠 '귀족 노조' '부도덕 노조'가 됐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파업하면 하청업체인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죽어 난다는 걸 알면서도 걸핏하면 파업을 자행하고, 직원채용을 빌미로 돈을 받는 노조가 귀족이 아니면 뭔가. 시민들뿐만 아니라 노동자들도 노조에 등을 돌리고 있다. 87년 20%에 육박했던 노조조직률은 최근 한자릿수로 떨어지기 직전이다. 코오롱.현대중공업 등 민주노총의 상징이던 대기업 노조도 잇따라 민주노총을 떠났다. 민주노총을 탈퇴한 뒤 이들 회사는 노사 상생 모범기업이 됐다.

"20년 동안 이기주의에만 매몰됐던 노동운동은 이제라도 국민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뭐가 잘못됐는지 단추를 모두 풀고 새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노동계의 대선배인 방 이사장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되새겨야 할 것이다.

김기찬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