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진단/고병철교수 미일리노이대·정치학(남북공존 유엔시대: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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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남이 북 포용해야 화해 결실/유엔가입만으로 「친밀」 보장되진 않아/적극적 관계개선 정책 필요
지난 1년간 전격적인 사건이 잇따라 일어나는 것을 지켜본 우리들에게도 5월28일 북한 유엔가입선언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다. 북한이 근20년간 고수해오던 정책을 하루아침에 번복하리라고 예측했던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북한의 정책변화의 가장 큰 의미는 폐쇄와 경직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 북한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외부환경에 유연성 있게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한 것이다. 우리는 북한이 정책을 1백80도 전환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미재의 괴뢰』라고 협상을 단호히 거부했던 박정희정권과 대화를 시작한 것,광주민주화항쟁 유혈탄압의 원흉이라고 적대시하던 전두환정권과 대화를 한 사실,카터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이 공동제의한 3자회담을 4년이상 반대하다가 자기안으로 탈바꿈해 제의한 것,일본과의 정부간 접촉을 회피하다가 국교정상화를 전격적으로 제의한 것 등은 북한이 반드시 정책일관성만 고집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전술적 조정을 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그러나 이번에 발표한 북한의 대유엔정책 변화는 북한의 입장으로 볼때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이것은 북한 외교부성명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남조선당국자들의 분열주의적 책동으로 말미암아 조성된 정세에 대처하여 불가피하게 취하게된 조치』였다.
북한이 남한의 단독유엔가입정책을 진심으로 「분열주의적 책동」이라고 믿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를 가질 수 있다.
북한은 동서독과 남북예멘의 통일이 이루어진 후에 남한의 단독유엔가입 또는 남북한의 동시가입이 한반도의 분단을 합법화하고 영구화한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는 외면해 왔지만 내면적으로는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논리를 남한의 재야세력과 일부인사들이 받아들이고 남한의 단독유엔가입정책을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북한에게는 고무적인 동시에 부담감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북한 외교부 성명은 정책변화의 불가피성을 북한 인민들뿐 아니라 「남조선 각계각층 인민들과 재야세력들」에게도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따라서 이 성명에서 『남조선 당국자들이 하나의 조선을 둘로 갈라놓는 천추에 용서못할 대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등 비난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은 북한 인민들과 남한 재야세력을 의식하고 하는 말이지 남한과의 적대관계를 계속하겠다는 의도의 표시는 아닌듯 하다.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게 된다는 것은 여러가지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그 의의를 과대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국제법상으로 국제기구에 같이 가입했다고 해서 회원국간에 서로 묵시적 승인을 했다는 효과는 없다.
남북한이 유엔헌장에 명시된 원칙들과 의무를 받아 들인다고해서 불법적 무력사용의 확률이 대폭 감소되고 평화적 방법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전망이 밝아졌다는 견해도 설득력이 적다.
남북한이 유엔무대에서 상호접촉뿐 아니라 다른 회원국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활발히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관측도 공신력이 낮다. 왜냐하면 남북한은 이미 유엔준회원국격인 업저버로서 별로 큰 제약을 받지않고 유엔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하면 남북한이 유엔에서 업저버로부터 정회원국으로 「승격」한다는 것 자체가 양국의 국제적 위상,외교능력 및 상호접촉기회를 증가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남한의 단독가입외교와 이를 저지하려는 북한의 대응외교같은 소모전을 지양하게 된 것은 누구나 다 환영해야 할 일이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북한이 유엔가입문제에 대해 실용주의적 정책조정을 한 것은 다른 분야에서도 전술적 적응을 할지 모른다는 기대를 낳게했다. 북­일 국교정상화회담과 북­미접촉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와의 핵사찰협정체결도 그 전망이 전보다 밝아진듯 하다.
앞으로 북한의 태도와 행동이 유연성을 더 보일 수 있을지,그리고 남북관계가 개선될 수 있을지를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는 남한의 대북한 정책이다.
남한은 분명히 외교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겸양과 관용의 미덕을 보이고 보다 더큰 성과를 얻기위해 북한에게 진정한 동포애와 화해의 의지를 표시할줄 아는 예지가 필요하다.
남한은 유엔가입 신청절차도 가능하면 북한과 협의해 밟는 것이 바람직스럽고 북한에 대해 적대국도 아니고 경쟁자도 아닌 민족공동체의 성원으로 대하겠다고 말한 7·7성명을 재확인하고 상응하는 정책조정을 단행했으며 좋을듯 하다.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의 과감한 수정내지 폐기,임수경양과 문규현신부의 조기석방,「북한이 적화통일정책을 고수하고 있다」는 공식성명의 지양 등 남한이 일방적으로 취할 수 있는 조치가 많이 있다고 본다.
이처럼 남한이 민족화해에 도움이 되고 통일지향적인 정책을 선택한다면 북한은 반드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다. 북한의 대유엔정책 변화가 이처럼 남북관계의 악순환을 종식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한반도에도 드디어 탈냉전시대의 서광이 비치게 될 것이고 민족의 숙원인 통일의 날도 한발짝이나마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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