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들이 좋아하는 시 특집『시와 시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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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공허한 군중이 행렬에 섞이어/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니고 뫘기에/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차단--한 등불이 하나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와사등』중)
소탈하면서도 중후한 연기로 시청자들의 인기를 끌고 있는 탤런트 최불암씨는 김광균의 시『와사등』을 가장 좋아한다. 자신의 젊은 날의 낭만적 우울의 풍경이 이 시 한편으로 아스라이 떠오르기 때문이란다.
최근 출간된 시전문 계간지『시와 시학』여름호는 영화연극의 해 기념으로 특집「오늘의 방송연기자들 어떤 시 좋아하나」를 꾸며 최씨를 비롯, 김혜자·여운계·임현식·김한영씨등 탤런트·프러듀서 10명으로부터 좋아하는 시와 그에 얽힌 사연들을 실어 흥미를 끈다.
전후 50년대부터 문인들의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했던 명동의 주점「은성」. 한푼 돈이 없어 들어오기조차 주저하는 시인들에게 문간에서 막걸리 한사발이라도 대접하곤 했던 인정 넘치는 주인아줌마가 최씨의 어머님이었다. 그「은성」에서 마주친 김수영·천상병·변영노 시인들에게서 시인들의 아픔과 가난과 기행을 일찍이 실감한 최씨는『와사등』을 읊조리면 그 을씨년스럽던 50, 60년대 명동 뒤안길이 참으로 푸근하게만 떠오른다고 한다.
드라마『전원일기』에서 최씨의 아내역을 맡고 있는 김혜자씨는 쉴리 프리돔의 시『금간 꽃병』을 좋아한다.
『이 마편초 꽃이 시든 꽃명은/부채가 닿아 금이 간 것. /간신히 스쳤을 뿐이겠지/아무 소리도 나지는 않았으니//…//사람들의 눈에는 여전히 온전하나/마음은 작고도 깊은 상처가/자라고 흐느낌을 느끼나니/금이 갔으니 손대지 말라.』
학창시절 눈물이 펑펑 솟아질 정도로 마음에 부딪쳐오는 시들을 밤새 옮겨쓰고 그림도 그려 애송시첩을 만들었다는 김씨는 이 시가 젊은날의 남모를 투명한 아픔으로 다가와 애송하게 됐다고 한다. 부채의 바람이 닿아 금이 간 수정의 꽃병, 그 투명하고 아름다운 상처의 의미와 시들어가는 마편초 꽃의 여린 아픔을 노래한 이 시가 인생과 사랑에 새롭게 눈 뜨인 시절, 김씨의 영혼을 밝게 울리는 수정음 같았다는 것이다.
한편『전원일기』를 연출했던 MBC프러듀서 김한영씨는 신경림씨의 시집『농무』를 통째로 좋아한다.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가면 세상은 온통/하얗구나』 (『겨울밤』중)
8, 9년 전『전원일기』를 연출할 당시 틈만 나면『농무』를 들추곤 했다는 김씨. 현대 도시인들이 잃어버린 농촌정서가 알알이 새겨져있고 당시 농촌의 실정과 농부들의 고달프고도 정겨운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배어있어『전원일기』의 이미지나 소재 착상에『농무』가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방송인·연기자들이 좋아하는 시와 그 이유를 들어보면 시가 얼마나 우리 일상에 파고들어 삶을 윤택하게 하고 있는 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이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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