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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화두 던져 현대사 흐름 바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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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87년 1월 15일, 중앙일보 사회면 한편에 실린 2단 기사 하나가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다. 박종철씨 사건이 세상에 처음으로 드러난 것이다.

당황한 경찰은 사건을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다음날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믿기지 않는 발표를 했다. 언론에서 앞다투어 의혹을 제기한 뒤에야 경찰은 "수사관 두 명의 물고문으로 질식사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추도집회가 열렸다. 하지만 추도 열기가 식을 때쯤 놀라운 진실이 밝혀진다. 5월 18일 김승훈 신부가 미사 도중 "경찰이 박종철씨 사건의 진상을 조직적으로 조작.축소했다"는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전두환 정권의 호헌조치와 맞물려 분노한 국민들의 규탄대회가 이어졌다. 6월 10일엔 전국 22개 도시에서 박종철씨 사건 규탄과 호헌 철폐를 주장하는 6.10 대회가 정부의 불허 방침에도 50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이후 연세대 학생 이한열씨가 9일 집회에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것이 알려지면서 시위는 더 격화됐다. 결국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는 29일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인다"는 6.29 선언을 발표한다.

이 사건은 강압 수사에 의해 억울한 피의자를 죽게 한 단순한 사건일 수 있다. 하지만 박종철 사건은 군부 권위주의 정권의 반인권적 속성과 본질을 드러내면서 민주화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서울대 박효종(국민윤리) 교수는 "국민에게 인권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고 군부 권위주의를 타파해야 한다는 민주화의 화두를 던져준 역사적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이어 "민주화를 이룬 지금의 한국 사회에도 민주주의의 질을 심화시켜야 하는 숙제가 아직도 남아 있음을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 현재에도 그 의미가 각별하다"고 강조했다.

◆14일 대공분실서 추모제=11일 오후 1시쯤 서울 명동 YMCA연합회 옥상엔 '대학생 고문받던 중 사망'이란 제목의 신문 호외가 뿌려졌다. 그러나 사실 이 '호외'는 '6월 민주항쟁 20년 사업추진위'가 박종철씨 사망 20주기를 맞아 당시 상황을 재연하기 위해 벌인 이벤트였다.

함세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등 추진위 소속 인사 50여 명은 명동 일대에서 호외 3000여 장을 배포했다. 대구.대전.전주 등 6개 도시에서도 같은 행사가 열렸다.

추진위는 14일 박씨가 고문당한 구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에서 박씨의 20주기 추모식과 6월 민주항쟁 20년 사업 선포식을 개최할 예정이다.

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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