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다운 장례식 치르자(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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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어떤 경위로 세상을 하직하든 죽음의 의식은 생명의 탄생 못지 않게 엄숙하고 신성하게 치러져야 한다. 죽음 자체는 슬프고 불행한 일이지만 죽음을 떠나 보내는 의식만큼은 정숙하고 장엄해야 함은 인류공통의 변치 않는 의식이다.
특히 강경대군은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억울하고 처참하게 변을 당한 죽음 앞에서 분노하고 통곡하는 부모의 한맺힌 설움이나 동료 대학생들의 의분,뜻을 같이하는 시민들의 소리없는 아우성 등이 예사로운 장례식과 같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결식과 노제로 이어진 장례일정이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전쟁터를 방불케한 어제의 장례모습을 보면서,억울하게 죽은 강군의 영혼이 20일째 거리에서 영안실에서 헤매며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난장을 보고 엄숙해야 할 장례식이 저럴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일반 국민들의 정서속에는 아직도 장례식은 장례식 다워야 한다는 의식이 마음 깊이 깔려 있다. 이미 우리는 강군 참사가 있은 직후 억울한 죽음이 결코 또다시 정치투쟁의 볼모로 저당잡혀서는 안된다고 경고한 바 있다.
또 강군의 참사는 정부의 강성기류가 몰고온 공격적 시위진압이었기 때문에 참사의 핵심적 요인인 공안통치의 징후를 철회해야 함도 지적했다. 그러나 정부는 공안통치란 공공안녕질서를 위한 공권력의 집행이라고만 되풀이 말하고 있을 뿐이다. 답답한 일이다.
강군 참사가 정치권의 이용물로 저당잡혀 이미 숱하게 보아온 야당의 가투,장외투쟁이 오늘의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라고도 경고했지만 야당은 시위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가투에 앞장서고 있다.
우리는 항의를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억울하게 죽은 한 젊은이에 대한 울분과 항의는 표현되어야만 그 재발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도 한계가 있다. 어제 하루의 시위로 이젠 자제되기를 우리는 당부한다.
정부는 밀리지 않기 위해서,야당은 대권을 향한 물실호기의 기회로 이용하기 위해서,운동권의 핵심은 대중지지기반의 확대를 위해서 장례식을 이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또 바로 그런 이유들 때문에 엄숙해야 할 장례식이 난장판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시청앞 노제를 치르지 않고서는 장례식을 무기한 연기할 수 밖에 없다는 대책위의 결정을 보면서 더이상 장례식이 투쟁의 도구로 이용될 수 없다는 결론을 갖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엄숙해야할 장례식이 난장판으로 연이어 벌어진다면 죽음의 의식에 대한 우리의 보편적 정서에 역행할 뿐만 아니라 그런 극단적 형태의투쟁 자체가 주체측 의도와는 반대로 국민적 지지를 상실하는 반인륜적 투쟁으로 비쳐질 수 있다.
강군의 장례식은 현 정권의 민주화 개혁을 촉구하는 계기의 자리가 되어야하는 그 만큼 그 장례식도 엄숙하고 신성하게 치러져야 할 것이다. 장례식답게,민주화개혁촉구는 민주화운동답게 치러지기를 당부하는게 말없는 다수 시민들의 간곡한 당부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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