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만장(촛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사랑도 명예도/이름도 남김없이/한평생 나가자던/뜨거운 맹세….』
분신자살한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의 장례식이 열린 12일 정오 서강대 청년광장.
낮고 느린 목소리의 『님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광장주변은 『열사여 고이 가소서』 등의 구호가 적힌 가로 1m·세로 5m 크기의 울긋불긋한 대형만장 50여개로 둘러싸여 있었다.
특히 본관건물의 앞면은 전태일씨 등 먼저 산화한 선배들의 이름으로 된 검은 만장 10여개로 완전히 가려진 상태였다.
문익환 목사의 개식사로 시작된 영결식은 김경란씨(35·서울노동자문화단체협의회·여)가 「열사 부활굿」으로 분신·투신과정을 흰천과 선홍빛천을 이용해 재현하는 것으로 끝났다.
소복차림의 김씨가 붉은천을 머리에 쓰고 땅에서 뒹굴며 버둥거리다 실신하는 모습에 유족들은 『기설아…』를 외치며 오열을 참지 못했다.
마포에 산다는 오계순 할머니(75)는 거리에서 장례행렬을 지켜보며 『불쌍해서 죽겠네… 저 젊은사람이… 아까워서 어쩌나…』를 연발했다.
또 시민 주경호씨(43·상업·서울 전농동)는 『이런 일이 자주 생기다니 기가 막힌다. 다들 빨리 제정신을 차려야 할텐데…』하며 비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신촌 로터리에서 노제를 지낸 뒤 형형색색의 만장과 깃발을 뒤로 하고 떠나는 영구행렬을 바라보면서 이제 「우리시대의 만장」은 더이상 만들어져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계속 머리속을 맴돌 뿐이었다.<정형모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