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현장의 토론(촛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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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지금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4,5년후 경대처럼 허망하게 목숨을 잃을지 모르겠다 생각하니 학교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범국민대회가 열린 9일 오후 8시 최루가스가 자욱한 서울 종로3가 단성사앞 네거리.
불과 2백∼3백여m 밖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중인 가운데 학생과 퇴근길 시민 등 3백여명이 현 시국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좌중의 박수를 받으며 시민연사(?)로 나선 정모씨(40·서울 K중 교사)는 『교단에 서는 나로서는 내 제자와도 같은 경대의 죽음이 너무나 가슴아팠다』고 시위참가 이유를 밝혔다.
『사람은 제발 그만잡고 물가나 하루빨리 잡아서 장사좀 편하게 할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노점상을 하는 50대 아저씨의 말.
또 고향이 제주도라는 40대 노동자는 우루과이라운드탓에 부모님이 지으시던 귤농사를 다 망치게 됐다며 『우리정부가 우리농민을 보호해주지 않으면 도대체 누가 해줍니까』라고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강남의 아파트 한평이 몇천만원이나 한다는데 한달에 고작 40∼50만원 월급받아 언제 집 한칸 살수 있겠습니까.』
마침 이날이 월급날이었다는 회사원 김모씨(33·서울 행당동)는 월급봉투를 받고도 기쁘기는 커녕 허탈하기만 했다고 말했다.
상인·회사원·교사·주부 등 이날 발언권을 얻어 자기주장을 편 각계각층 시민들은 정부에 대해 그들의 피부에 와닿는 갖가지 불만들을 토로했고 그때마다 진지하게 경청하던 청중들은 공감의 박수를 보냈다.
한편 이날 토론회에 모인 시민들은 단순히 불만을 토로하는데 그치지않고 뼈아픈 자기반성을 하는 성숙한 모습도 보여주었다.
『잇따른 학생들의 죽음이 어떻게 현 정권의 탓 뿐이겠습니까.』 대학에 다닐때 학생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졌었다는 최모씨(28·여 학원강사·서울 구의동)는 『자기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한 기성세대의 무관심과 그저 그때만 목소리를 높이는 재야·학생들의 소극적 태도에도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이날 토론회는 자칫 흥분하고 격해지지 쉬운 시위현장에서도 시종일관 차분하고 진지하게 1시간여 동안 계속됐다.<신예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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