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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월 문학」의 가시밭길|광주항쟁 작품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진달래꽃이 피었는디
진달래꽃이 피었는디
아가 무신 잠이 이리도 깊으냐
십 년 넘은 바위 잠이 어디있느냐
아이고 다리 패던 허망한 숲 그늘 길
끈적하게 타오르는 저 먼 분홍산.』
광주항쟁 11주년을 맞아 최근 한 문예지가 꾸민「5월 문학」특집 중 팍재구씨의 근작 시 『분홍산』중 일부다. 그해 5월 광주의 삶과 죽음이 인간의 근원적 한, 남도 특유의 한과 가락 그 너머로 아스라이 소멸돼가면서도 오히려 끈적하게 그날을 떠오르게 하는 시다.
이 특집에서 5월 문학에 대해 평론가들은『이성적이기보다 감정적·직정적 이었다』『문학사적 의미만 가질 뿐 요즘 읽을 맛은 안 난다』는 등의 한계도 지적하고 있다. 11년이란 시간적, 아니 심미적 거리를 갖고 5월 문학을 바라볼 때의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이 광주문인들에게 심미적 거리를 갖게 할 수 있었을까.
『자네 50분 이내로 광주사람들이 겪고있는 아픔을 시로 써오소.』
80년 6월1일 오전. 시인 김준태씨(43)는 전남 매일신문 편집부국장인 소설가 문순태 씨로부터 다급한 시 청탁 전화를 받는다. 전화를 받은 즉시 김씨는『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죽음과 죽음 사이에/피 눈물을 흘리는/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로 시작되는 2백30항의 장시를 단숨에 써 내려갔다.
물론 주어진 시간도 없었지만 울분을 뚫고 용솟음 치는 언어들이 시간의 있고 없음, 시의 미학성을 따질 겨를을 주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쓰여져 계엄사 검열로 74행만 실린 시가 5월 문학의 신호탄이 된『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다. 시를 보내고 난 직후신문사 관계자로부터 검열관이 시를 보더니『이×× 경을 쳐버려야겠다』고 하더란 말을 듣고 김씨는 잠적해버렸다.
호남선 철도 등과 모든 도로망이 차단되고 중앙 일간지 등 정보망도 차단돼 섬으로 남은80년 5월 광주의 한가운데서 광주시민들 자체도 목말라하는「광주사태」에 대한 정보를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김씨. 몰래 미문화원에 들어가 타임·뉴스위크 등에서 광주관련 기사를 보고, 고성능 라디오로 일본 NHK방송을 수신하고, 또 외국의 인권단체들로부터 날아온 광주에 대한 지지성명들을 번역하는 등 광주관련 정보들을 모아 알리기에 바빴던 김씨의 뒤늦은 도피생활이 이 시 한편으로 시작된 것이다.
23일간 도피행각을 벌이던 김씨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음을 알고 6월23일 집으로 돌아온 즉시 연행돼 보안대로 끌러갔다.『영원한 청춘의 도시라니, 너 광주를 다시 선동하려했지』등 그 시를 둘러싼 1박2일간의 심한 신문과 고문 끝에 김씨는 교직자 사표를 쓰고 재직하던 전남고로부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어느 곳에도 취직할 수 없게 만들어 밥줄을 끊으려는 당국의 보이지 않는 조치로 김씨는『리어카 한대 사서 무등산 수박장사나 할꺼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배고픔의 수난을 겪게된다.
『나는 영웅도 호걸도 아니면서/무슨 정치가도 혁명가도 아니면서/광주사태 관련자 폭도 명단에 끼어/2백 만원 현상 붙은 죄인이어야 하니/대체 어찌된 일인가?/쩨쩨하게 마누라 새끼들 걱정에/밤잠을 못 자고 괴로워하면서/사망자 명단이 아닌 수배자 명단에 끼어서/나는 지금 누구와 대결하는 것일까?』 80년5, 6월 두 달 가량의 도피 중 써놓은 시를 묶어 곧 시집으로 펴 낼 문병란씨(56)도 대학강단에서 쫓겨나야 했던 5월의 시인이다.
80년4월 농민·노동자를 주제로 한 시를 모은 시 선집『버들의 속삭임』을 펴내고, 10·26이후 활성화된 각종 단체에 나가 강연 등을 통해 광주의 민주화를 이끌던 문씨는 5월18일 오전 광주YWCA의 노동자를 위한 문학강의를 마치고 피신했다. 광주문인으로서는 송기숙씨(56)와 함께 현상 수배된 상태에서 6월25일까지 여수의 한 제자 집에 은닉하던 문씨는 다음날 자진출두 형식으로 보안대에 연행돼 그해 12월말 기소유예처분으로 석방됐다.
재직하던 조선대로부터 쫓겨남은 물론 직장도 구할 수 없고 시집을 내면 판금조치 당하는 등 밥벌이 수단을 원천봉쇄 당한 상태에서 문씨는「거리에서의 삶을」88년까지 보내야했다. 5월 문학에 대한 강연이면 전국 어느 곳, 심지어 독일·미국 등 해외까지 나갔고, 사람 가리지 않고 주례를 맡아 결혼식장을 5월을 증언하는 자리로 만들었던 문씨에게는 어느덧「거리의 교사」란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78년 6월27일 전남대 교수 11명의 교육민주화선언인「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 해직돼 80년 봄 시간강사로 다시 강단에 설 수 있었던 작가 송기숙씨도 전남대에서 다시 해직 당해야했다. 80년5월 올곧던 해직교수로 대학생들에게 신망 받던 송씨는 시민들이 광주에서 계엄군을 내몬 그날부터 사태수습을 위해 노력하다 계엄군의광주진입 시각과 때맞춰 피신했다. 6월27일 자진출두형식으로 보안대에 연행됐다.
보안대에서의 20여 일간의 신문과 고문 끝에 송씨에게는 내란음모 죄가 적용돼 징역 5년의 선고가 내려졌으나 이듬해 4월 형 집행 면제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풀러난 뒤 그들은 나에게 일체의 생계수단을 주려하지 않았습니다. 작품집을 내면 판금조치는 물론 이미 나와있는 문학전집에서마저 내 작품을 모조리 빼버렸습니다.
『연탄 리어카라도 끌어볼까』『무등산 수박 행상이라도 벌여볼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생계수단 강탈이란 탄압에도 불구하고 광주문인들은 그날을 시와 소실로 형상화해냈다. 『광주의 5월은 단순한 봉기가 아니라 인심이 천심이라 믿는 순수한 시민들이 엮어낸 가장 찬란한 공동예술이었다』고 말하는 김준태씨의 표현대로 광주문인들에게 있어 그날 광주의 현장과 그들의 문학과는 어떠한 거리도 있을 수 없었다.
농경민족으로서의 가장 아름다운 정신인 공동체정신이 빚어낸 행위예술이라는 평가도 받는 광주항쟁은 이듬해「5월시」『시와 경제」등 젊은 문학동인들에 의해 박노해·백무산으로 대표되는 노동문학, 나아가 80년대 문단을 지배했던 민중문학·반 외세문학·통일문학의 양을 열게 했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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