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사우디아라비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9.11테러 당시 공중납치범 19명 가운데 15명이 북한 사람이었고, 그들의 공격으로 3천여명의 미국인이 희생됐다면 신문들은 '북한이 미국을 공격했다'고 제목을 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테러리스트 15명이 사우디아라비아 사람이었지만 아무도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을 공격했다'고 제목을 달지 않았다. 부시 대통령, 도대체 어찌 된 거요."

"부시 대통령 당신도 비행기 조종사 출신이니까 알겠지만, 시속 7백50km로 달리는 대형 여객기를 조종해 5층 건물(미 국방부 건물)의 벽에 충돌할 정도의 조종술은 민간학원에서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는 배울 수 없는 기술이잖아요. 그거 혹시 어디 공군에서 배운 것 아닐까. 사우디 공군 같은 데서 말이야."

미국의 영화제작자이자 작가인 마이클 무어가 이달 초 내놓은 책 '친구, 내 나라는 어디 있는 거요?'에서 부시 대통령에게 던진 독설들이다. 텍사스 석유업자인 부시 가문과 사우디아라비아의 특수관계에 주목한 음모론적 문제 제기다. 크게는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작게는 부시 가문과 오사마 빈 라덴 가문의 유착(癒着)을 가정하고 있다. 그래서 9.11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사우디아라비아의 배후 역할을 숨기지 않았느냐는 의혹 제기다.

1990년 제1차 이라크전 이후 미군이 사우디에 주둔하게 되자 빈 라덴은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에 대해 "부패한 왕족의 통치가 미국에 의해 연장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사우디는 가장 신성한 나라여야 한다. 사우디 왕가는 18세기 서구 열강의 동진(東進)에 맞서 순수한 이슬람정신으로 돌아가자는 복고운동으로 아라비아 반도를 정복한 원리주의자들이다. 사우디는 성지(聖地) 메카의 나라며, 아직도 코란이 헌법을 대신하는 나라다. 그러나 1938년 유전개발이 시작되고, 미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원리주의적 사회질서는 전체주의적 폐쇄체제로 굳어져 왔다. 그 경직된 원리주의적 전통이 테러를 낳은 셈이다.

지난 주말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하자 외신들이 일제히 "이번 알카에다의 테러 목표는 사우디 왕가"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사우디에서의 테러가 더욱 심해질 것이란 예측도 이어지고 있다. 먼 길을 돌아 이제 사우디가 세계의 주목을 받을 차례다.

오병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