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각제 되살아날까 불안 민주계|수면 하 숨은 민자당 대권후보경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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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금년 초부터 빠른 속도로 부상하기 시작했던 민자당내 차기 대권후보 경쟁이 박철언 체육청소년 장관의 월계수회 고문 직 사퇴라는 의외의 변수에 부닥치면서 수면하의 잠복상태로 들어갔다.
김영삼 대표의 민주계측은 박 장관의 고문 직 사퇴를「정치적 실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동안 일관되게 요구해 왔던 차기대권구도의 조기 가시화와 조기 전당대회 소집 주장에서 일단 후퇴, 광역의회 선거를 승리로 이끌기 위한 당내 계파간 단합을 강조하며 유화적인 제스처를 써 보이고 있다.
김 대표 본인 역시 전에 없이 밝은 표정과 함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이면서 분파행동으로 비춰질 수 있는 민주계 인사들과의 회동 등은 극히 자제하고 있다.
민주계가 조기 전당대회 소집 등을 요구할 경우 단호하게 대처하겠다며 적의를 불태워 왔던 민정계도 김 대표나 민주계에 대한 일체의 비난과 공격을 삼가면서 박 장관 퇴진 이후의 권력 핵심부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고 공화계 역시 공식적 반응을 자제하면서 당내 저변에 흐르는 기류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광역의회 선거가 끝난 직후인 7, 8월중 차기 대권 후보를 둘러싸고 계파간에 사활을 건 숙명적 대결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였던 민자당은 박 장관이라는 뇌관이 제거됨으로써 외견상으로는 일단 평 온을 되찾은 모습이며 적어도 14대 충선 전까지는 차기 대권 후보 경쟁은 잠복 상태에 들어갈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민자당에 각 계파가 7, 8월 대회전불사의 강경 입장에서 자제와 관망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데는 박 장관을 퇴진시킴으로써 당내 대권후보 경쟁의 불씨를 진화하겠다는 노태우 대통령의 의도가 주효했다고 볼 수 있다.
김 대표의 민주계 측은 여권 내 최대 사조직인 월계수회를 전초기지로 한 박철언 장관이 노 대통령의 음양에 걸친 비호와 지원을 등에 업고 차기 대권에 도전하려 한다는 사실을 빌미로 삼아 광역선거가 끝난 직후 조기전당대회 소집을 요구하고 김 대표는 노 대통령과 담판을 지어 차기 대통령 후보로 내부지명을 받아 내겠다는 구상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김 대표와 민주계 측이 최대 구실로 삼았던 박 장관이 노 대통령의 엄명을 받고 정치 2선으로 퇴진함으로써 김 대표 측은 조기전당 대회와 차기대권 구도의 조기 가시화를 주장할 명분을 잃고만 셈이다.
더욱이 명분도 명분이지만 김 대표 측으로서는 공격 목표를 상실하게 됨으로써 7, 8월 대회전을 유발시킬 적절한 계기를 마련하기가 현 상황으로서는 매우 어렵게 돼 버려 김 대표나 민주계 측은 자신들의 일관된 요구를 철회하고 일단 관망 쪽으로 방향을 수정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바로 이점을 노 대통령은 노린 것이며 박 장관 퇴진을 결정한 지난달 23일 청와대 가족회의직후 노 대통령은 청와대 참모를 김 대표에게 보내 자신의 뜻을 분명히 전달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이 참모를 통해 자신의 임기가 2년 가까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차기대권 운운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며 당내에서 대권 경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친·인척인 박 장관과 김복동씨의 차기 대권 도전에 쐐기를 박은 것이라는 점을 전달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 대표와·민주계의 움직임에 대한 사전봉쇄라는 의도와 함께 노 대통령의 이번 조치는 민정계 의원, 특히 민정계 중진의원들에 대한 강력한 경고 조치라는 것이 민정계의 분석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3당 합당 이후 당내에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민정계 의원들은 박 장관 때문에 민정계의 결속이 어려울 뿐 아니라 YS(김 대표 지칭)의 독주를 막을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왔던 만큼 박 장관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할 테니 민정계의원들도 결속하고 단합하는 모습을 보여 달라는 일종의「통치권 적 시위」라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박태준 최고 위원을 청와대로 부른데 이어 4월4일에는 김윤환 사무총장 등 민정계 핵심들을 차례로 불러 자신의 이같은 뜻을 강한 톤으로 주문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대통령 재도전에 강한 집념을 가지고 3당 합당의 전제조건이었던 내각제 개헌 합의를 마산파동으로 유산시켰던 김 대표로서는 노 대통령이 또다시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려 등 경우 자신의 대권 전략에 중대한 차질을 빚게 되고 이는 곧 자신의 정치적 행로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나 특히 민정계 내부에 내각제 추진 론 자들이 상당수에 이르고 있고 박 장관의 퇴진은 이들을 결속, 단합시키는 계기로 작용, 민정계가 과거와는 다른 힘을 갖고 내각제 개헌을 추진할 수도 있다는 점에 김 대표 측은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김 대표가 그동안 눈엣가시 격이던 차기 대권 쟁취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박 장관의 퇴진을 무턱대고 반길 수만은 없으며 노 대통령이 내각제 개헌에 대한 심경을 피력한 것으로 알려진 3·23 청와대 가족회의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김 대표 측은 따라서 노 대통령과의 신뢰관계 구축에 당분간 주력하면서 당의 지도체제를 「노·YS 단선체제」로 만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는 전략을 수립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노 대통령과 민정·공화계가 합작으로 추진할지도 모를 내각제 개헌 시도를 방지하기 위해 김대중 신민당 총재와의 교감의 폭을 넓혀 가면서 제한적 협조관계를 유지한다는 생각이다.
이에 반해 민정계 중진 의원들은 노 대통령의 궁극적인 정치 일정의 종착역은 내각제 밖에 없으며 노 대통령의 이번 조치는 노 대통령이 그동안 구상했던 정치 일 정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는 신호로 보고 있다.
김종필 최고 위원과 공화계 측도 박 장관의 퇴진 조치는 대통령직선제 하에서 차기 대권후보 경쟁은 있을 수 없으며 이는 내각제 개헌에 대한 노 대통령의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며 나름대로의 활로를 모색하고 있는 것도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 당3역을 지낸 민정계의 한 중진의원은『지난해 가을 내각제 합의 각서 파동 이후 표류상태에 있는 내각제 개헌에 대해 노 대통령이 적절한 시기가 오면 단안을 내리겠다는 일종의 신호』라고 분석하면서『민정계에서는 이같은 노 대통령의 뜻을 이심전심으로 수용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민정·민주계 모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은 박 장관의 재기여부.
과거 수 차례에 걸쳐 박 장관에 대한 노 대통령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박 장관은 일정기간이 지난 후 번번이 되살아났다는 전력에 대해 이들은 일말의 불안감과 의혹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민정·민주계의 의혹과는 달리 청와대 참모 진은 박 장관의 정치적 재기는 노 대통령의 임기 중에는 불가능하다고 단언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3·23 가족회의 이후 청와대 참모들뿐 아니라 박 장관과 막역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서동권 안기부장 등 고위 당국자들에게도 이같은 말을 분명하게 전달함으로써 박 장관을 정치전면에 롤백 시키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강렬한 의지를 표명했다. 아무튼 박 장관의 퇴진을 계기로 수면 하로 잠복한 민자당내 차기 대권 후보 경쟁이 광역선거를 거치면서 어떻게 가닥이 잡힐 는 지에 정가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문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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