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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 영화 작가 3人 대담] 이원형·이원재·노혜영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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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영화는 그 어느 때보다 코미디 장르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 '엽기적인 그녀’를 비롯해 ‘조폭마누라’‘가문의 영광’‘동갑내기 과외하기’ 등 2, 3년새 흥행 수위권의 태반을 코미디가 차지했다. 한 때 충무로에서는 “코미디가 아니면 투자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이 돌았을 정도였다. 올 들어서도 ‘색즉시공’‘선생 김봉두’‘첫사랑 사수 궐기대회’‘싱글즈’‘오! 브라더스’‘위대한 유산’ 등이 열기를 잇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른바 조폭코미디의 범람, TV 개그 프로그램의 재탕과 같은 코미디 영화의 얄팍함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이달 개봉하는 ‘은장도’와 ‘최후의 만찬’은 이런 우려를 정당화하기라도 하듯 많은 허점을 내보였다. 그동안 유행했던 코미디영화 형식이 막판까지 온 게 아니냐는 진단도 나오고 있다.

‘선생 김봉두’‘재밌는 영화’ ‘위대한 유산’의 각본에 참석했던 이원형(32)·이원재(29)씨와 ‘싱글즈’‘영어완전정복’의 각색자인 노혜영(29)씨가 ‘요즘 코미미영화’에 대해 속내를 털어놨다. 특히 이원형·원재씨는 형제간으로 계속 공동 작업을 해왔다.

이원형=어릴 때부터 친구들 모아놓고 웃기는 얘기하는 걸 즐긴 편이라 코미디 영화를 많이 봤다. 그런데 과거의 코미디는 깊이 생각하면서 웃기는 형이 많았다면 요즘은 엽기적이고 자극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강하다. '엽기적인 그녀'의 히트에서 보듯 여기엔 인터넷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제작자들도 인터넷에서 쓰이는 젊은이들 사이의 은어나, 톡톡 튀는 대화체를 선호한다. 욕설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섬뜩할 정도의 욕설도 많다. 난 기독교인이라 목사님이 내 영화를 자주 보러 오는데 욕설이 많이 나오면 얼굴을 찌푸리신다. 애초 대본엔 없었는데 촬영 현장에서 추가되거나 배우들이 애드리브로 덧붙이는 경우가 많다.

노혜영=난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고 TV 시트콤 보조작가 생활을 거쳐 영화계로 들어왔다. 이전엔 영화가 문화라고 생각했는데 일하다 보니 영화는 1백% 엔터테인먼트, 즉 오락물이라고 믿게 됐다. 제작진도 좀 더 강한 웃음을 유발하도록 써달라, 박장대소하게 하라는 식의 요구가 많다. 웬만해선 관객들이 잘 웃지 않으니까 점점 더 자극적으로 된다. 그러다보니 특색있는 코미디가 별로 없다. 감독의 작가색을 알 수 있는 코미디, 즉 누가 감독한 코미디라는 브랜드가 없이 그냥 웃기는 영화만 양산되고 있다.

이원형=이전엔 영화란 조용하고 컴컴한 공간에서 보는 어떤 숭고한 행위와 같은 거였다. 영화도 감독과 작가를 찾아가면서 봤는데 이제는 배우를 좇아다니며 본다. 단발적인 에피소드나 자극적인 것을 원하는 관객의 입맛에 맞추다 보니 각본 쓰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이렇게 쓰면 관객들이 안 좋아해"라며 옆에서 '태클'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코미디의 주인공이 음식을 토해내는 등 저속한 행동을 많이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노혜영=각본 단계에서는 드라마 구조에 신경을 많이 쓰는데 완성된 영화를 보면 웃음과 캐릭터만 남는 경우가 많다.

이원형='위대한 유산'의 경우도 대본 과정에서는 영화의 구성과 구조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구성은 줄거리로 요약되고 배우 개인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단발적 대사나 '까르르' 웃기는 것에 초점이 맞춰졌다. 요즘 코미디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한참 웃기다가 막판에 울리는 게 정석처럼 굳어졌다는 거다. 우리 관객은 정이 많아 그런지 배우가 울면 따라 울어버린다. 그러나 이건 얄팍한 상술과 기교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반전의 묘미나 특색있는 코미디가 안 나오는 것 같다.

이원재=질좋은 영화가 나오기 위해서는 감독이 각본에 대해 잘 알고 작가와 호흡을 맞추어야 한다. 작가와 감독이 따로따로 노는 경우는 작품의 균질성이 흐트러질 수 밖에 없다. 대본 작가이자 배우인 아담 샌들러 같은 이는 대학 동창들이 계속 팀워크를 이뤄가면서 작업하니까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원형=한국엔 김상진 감독, 박정우 작가 콤비가 그런 경우에 속한다. 작가와 감독이 죽이 맞으면 좋은 작품이 나온다. 서로 불신하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다. 멜로나 액션물 등 다른 장르에서는 시나리오 작가의 의도가 많이 반영되고 대본 수정도 많지 않은 편인데 코미디는 상대적으로 간섭을 많이 받는 것 같다. 누구나 웃길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노혜영=시나리오 작가라 하지만 그 위상에 대해 다소 피해의식이 있다. '열심히 써봤자 촬영 과정에서 또 바뀔 건데'라고 생각하면 힘이 빠질 때가 많다.

이원재=코미디영화라고 하면 다들 너무 쉽고 간편하게 보는 것 같다. 저예산으로 쉽게 후닥닥 만들 수 있는 게 코미디 영화라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인식이 바뀌어 하나의 문화로 자리매김했으면 좋겠다.

이원형=감독의 실험에 대해서는 바람직하게 생각한다. 영화란 감독이 총체적으로 책임지기 때문에 감독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된다는 건 안다. 그렇다고 작가를 제쳐놓고 독단적으로 처리하면 마음이 상한다.

노혜영=대본 작가로서 촬영 현장과 단절된다는 느낌이 소외감을 부른다. 감독이나 스태프들이 동등한 파트너로서 대해주면 좋겠다. 작가를 마치 타이피스트로 치부하는 게 아닌가라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일회용이 된 느낌이어서 당혹스러울 때가 여러 번 있었다.

이원형=촬영 현장에 가면 시나리오 쓸 때나 콘티를 짤 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를 볼 수 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감독과 의논해 현장에서 대본을 수정할 수 있으면 아주 바람직하다. 감독 스타일에 따라 다른 것 같다.

이원재=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 많은데도 아직 전문적인 작가층이 형성되지 않은 것도 이런 환경 탓이 아닐까 싶다. 외국에는 전문적으로 조감독만 하는 사람도 많은데 한국은 아직 그런 제도도 형성돼 있지 않다. 감독이 너무 전권(全權)을 휘두르는 체계라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이영기 기자<leyoki@joongang.co.kr>
사진=김상선 기자 <s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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