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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빌딩은 5형제가 기둥이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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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우당 선생 납북 등 비극의 가족사…어머니는 온갖 고생하며 자식들 키워

이코노미스트

그동안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켜온 대우그룹 김우중(69) 전 회장에 대한 사법 처리는 김 회장 측이 대법원 상고를 포기함으로써 11월 20일 종결됐다. 서울고법(11월 3일)에서 분식회계 및 사기대출, 횡령 및 국외 재산도피 등의 혐의로 징역 8년6월에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선고받을 때만 해도 대법원의 판단을 궁금해 했지만 김 회장 스스로 ‘경제가 어려워 나라가 어지러운 때 대법원까지 가서 법리 논쟁을 하고 시끄럽게 하는 것은 국가와 경제 전반에 바람직스럽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 변호인 측이 밝힌 상고 포기 이유였다. 사법 판단의 종결을 계기로 이코노미스트는 이번 호부터 김우중 회장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그동안 취재했던 내용 중 일부를 정리해 연재한다.


한국의 대기업 총수는 누구를 불문하고 특이한 발상과 특별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취재 결과 얻어진 결론이다. 특히 김우중 회장의 경우 경영 측면을 떠나서 가족사가 오늘날 어느 재벌가보다 깊은 우애와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새롭다.

외국의 기업평전에는 그 경영인의 일면을 조명해 볼 수 있는 자료로 가족사를 상당 부분 인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대우그룹의 망업지멸(妄業之滅)로 피해를 본 관련자들의 상처가 깊이 남겨져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직도 판단을 유보해야 하는 사실적 실록들이 이면사와 함께 평가를 기다리고 있는 만큼 대우그룹의 흥망성쇠는 이번 기회에 배제하기로 했다.

‘대구빌딩’이야 ‘제주빌딩’이야?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관문인 서울역 대광장을 내려다보며 턱 버티고 있는 25층 갈색빌딩. 대구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그 빌딩을 향해 ‘대구빌딩’이라 말하고 제주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제주빌딩’이라고 주장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렇게 부르는 이유가 있었다. 김우중 회장의 출생지가 대구였다. 그래서 대구 사람들은 김 회장의 출생지를 자랑스럽게 내세웠고, 김 회장의 뿌리를 보는 사람들은 선친을 생각하고 제주도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 얘기를 김 회장과 나누면서 빌딩의 본적이 어디냐고 물었다.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이 빌딩 기둥이 몇 개인지 알아요? 5형제가 기둥이야.”

두고두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대답이었다. 그것은 다섯 형제를 낳은 부친 우당 김용하(愚堂 金容河) 선생의 고향만을 말할 수도 없고, 대우는 5형제가 서로 도와주고 있다는 의미 같기도 했다. 김 회장의 인품을 보여주는 것이겠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국내 기업에서는 처음으로 가족이라는 개념을 도입시켜 ‘대우가족’이라는 로고를 사용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았다.

사실 대우빌딩은 처음부터 김 회장이 사옥으로 건설했던 것은 아니었다. 1974년, 당시 교통부에서 교통회관을 짓다가 공사를 중단한 상태로 둘 수밖에 없게 되자 그것을 김 회장이 인수해 대우센터로 만든 것이다.

김 회장을 재계에서는 한때 ‘합병과 인수의 귀재’라 했고, 일각에서는 ‘기업 사냥꾼’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지만 이런 평가가 정당한 것인지는 직접 경영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로서는 함부로 내릴 결론이 아니다. 정작 김 회장 본인은 얘기는 ‘그것도 경영의 하나’라고 했다.

그러면 5형제는 어떤 인물들이며, 김 회장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그리고 부인들까지 궁금했다. 사실 지금까지 김 회장에 관한 것은 여러 각도에서 조명이 됐지만 집안 내력이나 부인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더라도 접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알려진 것은 1985년 6월 11일, 제주도에 당시 공사비 28억원이 투입된 초현대식 ‘우당 도서관’이 완공돼 제주도에 헌납하는 행사를 할 때였다.

“아, 그날 다 모였어요. 우당이 돌아가신 아버님 호 아니오. 그런데 누가 행사에 빠질 수 있어요. 형제들 얘기? 허허. 형님들이나 동생이나 워낙 개성들이 뚜렷하니까 재미있을 거야. 그런 얘기는 둘째 형님인 관중 회장이 하시면 거침없이 잘하실 거요, 허허허.”

제주시 건립동 510번지 한라산 사라봉 기슭에 대지 2만3100평, 건평 6609평의 초현대식 우당 도서관이 제주도에 헌납됨으로써 일반에 알려진 우당 선생은 부인 전인항(全仁恒) 여사와의 사이에 다섯 아들과 딸 하나를 둔 제주도 북제주군 애월읍 출생의 선비였다.

1896년 12월생으로 19세 때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우당은 21세 때 일본 치하에서 관리 생활을 하다가 그들의 학정에 울분을 참지 못 해 관리 생활을 청산하고 일본 도쿄대 법정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아버지는 박정희의 스승

회장님이 국내 기업인으로서는 최초로 북한의 김일성을 만나시지 않았습니까?
“최초니 뭐니 그런 얘기가 뭐 중요해요? 기업 하는 사람은 그런 거 의미가 별로 없어요.”

김 회장의 성격 탓이겠지만 긴 답변이 없었다.

훗날 공장을 세우고 북한을 개발하는 문제에 대비해 원하는 만큼의 부지를 약속받은 것이 부친께서 평양에서 학교를 다녔다는 인연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허허. 그런 건 다음에 얘기하고. 기업 하는 사람이 남과 북을 경계선으로 생각하면 크지 못해요. 그건 정치인들이 생각할 부분이지. 세계가 대우의 시장인데 필요하면 어디인들 머뭇거려서 되겠소? 허허.”

90년대에 세계경영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동구권까지 진출해 공장을 건설하며 대우그룹을 성장시켰던 김 회장은 이미 이때에 세계경영을 구상했던 것이 아닌가 보여지는 답변을 해주고 있었다.

▶서울역 앞의 대우센터 빌딩. 김우중 전 회장은 다섯 개의 빌딩 기둥을 가리키며 “5형제가 기둥”이라는 말을 가끔 했다. 김우중 회장 형제들이 서로 도와주고 있다는 메시지였다.

어쨌든 ‘일본을 좀 알아야겠다’는 것이 일본 유학의 이유였다는 우당은 그러나 유학도 형편이 여의치 않아 2년 만에 중단하고 귀국해 지금의 서울대학인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했다. 그때가 1927년이었다. 졸업과 동시에 그는 대구사범학교 교사로 교육계에 투신했다. 이때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5·16 후에 회장님이 박정희 의장을 찾아가신 적 있죠?
“허허. 별 거 다 궁금하구먼. 오늘은 형님들 얘기가 궁금하다고 했으니 그 얘기만 해요.”

5·16 직후 최고회의 의장실로 젊은 청년 하나가 박태준 비서실장을 찾아왔다. 그는 낡은 사진 한 장을 내보이며 박 의장의 면담을 요청했다. 그가 김우중이었고, 사진 속에는 우당과 박정희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박태준 실장이 전하는 사진을 내려다 본 박 의장은 곧 자신의 집무실로 김우중을 불러들여 ‘많이도 닮았구먼’이라는 첫인사를 나누며 반가워 했다.

이것이 훗날 김 회장에 대한 박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지만, 김 회장도 박 대통령 서거 후에 기자와 만났을 때 박 대통령의 경제개발과 조국 근대화 얘기를 하면서 ‘두고 봐요.

내 언젠가는 5·16광장(여의도 광장을 그때까지도 그렇게 불렀다)에 박 대통령 동상을 세울 거요’라고 힘주어 말할 정도로 경제인으로서 보은의 심정을 담고 있었다.

아무튼 우당 선생은 나름대로 교육관을 정립하고 제자를 양성하면서 15년간의 교육자 생활을 해나갔다. 그러던 중 해방이 되자 그는 대구사범 초대 학장을 역임하게 됐고, 문교부 수석 장학관을 거쳐 서울 용산고등학교 교장, 경성사범 학장, 서울대 상대 교수 등을 지냈다.

그러나 우당의 이름이 전국의 학생들에게 알려지게 되는 것은 문교부 수석 장학관 시절이었다. 우당은 유명한 서예가였다.

남다른 예인의 풍걸(風傑)을 한껏 보여주며 서예의 한 경지를 이루면서 초대 국전 심사위원을 지내기도 했지만 장학관으로 붓글씨 교본을 펴냈던 것이다. 제주도 우당 도서관 안의 석문(石文) ‘홍익인간(弘益人間)’이 우당 선생의 글씨였다.

그러한 우당이 고향 제주도로 오면서 불행의 그림자가 덮인다. 1949년 4월, 우당은 제4대 제주도지사에 취임하지만 그의 경력이 보여주듯 정치적 아부를 할 수 있는 재능을 갖지 못한 성품이 결국 도지사 취임 8개월 만에 사임하는 단명 도지사 기록을 남기게 되고 초야의 생활로 몸을 담그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우당의 불행은 아니었다. 아직까지도 씻겨지지 않는 김 회장 가족사의 비극이며 민족의 비극이기도 한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공산당원들은 3000여 명의 애국지사를 끌어갔고, 그 속에 우당 선생이 포함되어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납북의 길을 가야 했던 것이다. 그때 우당의 나이 54세였다.

하지만 더 깊은 비극은 우당 선생만 끌려간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사실상 우당 선생의 둘째 아들이면서 가장 신망을 주었고, 당시 제주 도립병원의 내과 의사로 있던 김윤중도 함께였다.(한때 북한에서 보건 당국의 고위직에 있었고, 지금도 생존해 있을지 모른다는 미확인 설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더 이상 언급을 피한다. 호적에도 지워져 있다.)

물론 슬픈 얘기는 길게 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김 회장에게 있어 납북된 형은 열 살 남짓했을 때 헤어졌으니 그리움 그 자체였을 것이며, 앞서 언급한 대로 국내 경제인으로는 처음으로 ‘김일성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았던 92년 1월에 어쩌면 형의 눈물을 닦아주었는지도 모른다.

남편이 납북되면서 부인 전인항 여사의 고행은 피눈물 속에서 이어져 나갔다. 우리나라 여성계를 대표했던 이태영 박사 등 유수한 인재들을 길러낸 이화여전 1회 졸업생인 전 여사는 어린 자녀들을 안고 피란길에 유아원(탁아소 격) 원장을 하며 갖은 고생을 다했다.

산 중턱 외진 곳에 움막을 치고 살면서 매서운 눈보라가 칠 때는 어린 자식들을 몸으로 막아주면서 밤을 지새웠고, 철없이 칭얼거리는 막내에게는 손가락을 빨리며 잠을 재웠다. 도지사를 지냈던 사람의 부인이 간식 먹일 것이 없어 손가락을 빨려야 했다면 그 생활은 어떠했을 것이며 그 가슴은 얼마나 아팠을까?

둘째 형도 납북

“막내가 우니까 어머니가 얼른 돌아앉아요. 그러면 막내가 울음을 곧 그친단 말이에요.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막내한테만 사탕 같은 거라도 주나보다 하고 목을 쑥 내밀고 등 뒤로 훔쳐봤지요. 손가락을 빨리는 거예요. 그래도 그게 얼마 안 가서 또 울어요. 그러면 엄지에서 간지로 바꿔서 빨리고…. 나중에 보니까 어머니 손가락이 부어오른 듯이 벌겋고 벗겨진 데도 있고….”

둘째 형인 김관중 회장(전 대창기업)의 젖은 회고였지만 어머니는 그 모든 고행을 언젠가엔 돌아올 남편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정신으로 이겨나갔다. 지금의 서울 정동교회에 ‘인항홀’이 있다.

바로 전 여사의 기독교 정신을 기려서 세운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전하고 있지만 전 여사의 일생은 그렇게 가시밭길이었다. 이러한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성장한 자식들이 5형제와 외동딸이었다. <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leeho52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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