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만들기] 45. 목동 주민의 저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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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80년대 전반 강서구 목동.신정동 일대, 그 중에서도 안양천변 '뚝방동네'는 서울에서 집값과 방값이 가장 싼 곳이었다. 안양천 악취와 무허가 공장의 소음, 그리고 여름마다 찾아오는 홍수 등이 뚝방동네 주민의 삶을 위협했다.

그러나 83년 4월 발표된 목동신시가지 개발 계획은 그들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뚝방동네엔 천주교 목동교회가 있었다. 목동.신정동 주민 약 2천명이 교인이었다. 개발 계획이 나오자 이들을 주축으로 한 '목동지역 철거대책 추진위원회'가 구성됐다. 위원회는 각계에 보낸 건의서.진정서 등을 통해 주민의 어려운 사정을 설명하고 ▶대책 없는 철거 금지▶기존 무허가 건물 재산권 인정▶15평형 연탄난방 아파트 건립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세입자 대책과 무허가 건물 보상금 등을 검토해보겠다고만 답한 채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이런 가운데 투기꾼들이 모여들어 2백만원 하던 입주권 값을 1천만원으로 올려놓았다.

83년 8월 26일 대책위 회장단은 구청장과 만나 허가.무허가 건물을 따지지 말고 모두 시가(時價)로 보상해달라고 요구했지만 확실한 답변을 받아내지 못했다. 이들은 그날 밤 강서경찰서로 끌려갔다. 대책위 회장단의 연행 소식을 들은 주민 3백여명이 경찰서로 몰려가 농성을 벌이자 경찰은 다음날 새벽 회장단을 풀어줬다. 그러나 8월 27일 주민 1천여명은 안양천변 축구장에서 시위를 벌였다. 시위 진압을 위해 수백명의 전경대원이 동원됐다. 많은 부녀자가 참가한 극렬 시위에 정부 고위층도 크게 놀라 언론보도를 통제했다. 정부는 같은 해 9월 무허가 건물에 대해서도 감정가액으로 보상금을 줄 수 있도록 서울시에 조례를 개정토록 했다. 주민의 사생결단식 저항에 대한 패배 선언이었다.

그러나 세입자 문제가 남아 있었다. 엄격히 따지면 세입자 문제는 세를 준 사람과 세를 든 사람이 해결해야 할 사안이지, 시에서 개입할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종교단체와 학생들이 가세한 시위가 85년 3월까지 계속됐다. 시위 양상도 점점 격렬해졌다. 결국 그해 3월 18일 세입자 이주대책이 발표됐다. '정상 가구에는 목동에 건립되는 임대아파트의 방 한칸에 입주할 수 있도록 한다.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가구에 대해서는 가구당 30만원의 이주 보조금을 지급하되 가족 1인당 5만원씩 더 준다'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서울시의 2차 패배 선언이었다.

무허가 건물 소유주들은 서울시의 보상금액에 불만을 나타내며 허가.무허가 가옥주에게는 목동에 들어서는 20평형 아파트를 무상으로 달라고 요구하며 84년 12월부터 시위를 벌였다. 갈수록 강도를 더해가던 시위는 마침내 85년 3월 19일 강서구 부구청장을 인질로 납치하는 사태로 악화됐다. 16시간 동안 계속된 부구청장 감금 사태는 TV와 라디오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이 사건으로 가옥주 대책위원회 위원장 등이 경찰에 연행되자 3월 20일 밤 주민과 학생들이 합세한 시위대가 목동지구 내 한국건업 매립현장사무소로 몰려가 불을 질러 2층짜리 가건물을 전부 태워버렸다. 시위대의 납치.방화 등으로 여론이 나빠지자 당국이 강경책을 펴기 시작했다. 결국 방화사건 닷새 뒤부터 주민은 뿔뿔이 뚝방동네를 떠났다. 이 같은 목동 철거민의 과격하고도 치열했던 저항의 후유증은 심각했다. 서울시의 신시가지 개발 의지를 꺾은 것이다. 사실상 목동 개발 이후 서울시는 자력으로 신시가지 개발사업을 벌이지 않고 있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정리=신혜경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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