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생활 조금도 부럽지 않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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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상을 타게 됐다는 연락을 받고 그날 밤 생각 참 많이 했지라. 촌으로 시집와 본께 처음엔 낯설고 힘들어 울기도 많이 했응께. 근디 오늘 서울 와본께 인자 도시서 살라케도 못살 것 구먼이라.』
9일 오후4시 쌍용빌딩 회의실에서 열린 사단법인 「가정복지연구원」제정 제1회「농촌마을주부대상」시상식에서 수상자 오계순씨(32·전남 완도군 완도읍 중도리553)는 『시골에도 웬만한 문화시설이 다 있고 게다가 공기 좋고 인심 좋으니 도시 부러울 것 하나 없지라』며 투박한 호남사투리로 농촌자랑을 하며 수상소감을 대신했다.
도시·농촌 짝짓기모임인 가정복지연구원이 날로 심각해져 가는 농촌총각 장가보내기운동의 하나로 제정한 이상의 첫 수상자 오씨도 10년전 이 연구원의 주선으로 결혼한 케이스.
오씨는 경남 진주에서 여고를 졸업하고 진주YWCA에서 일하던 인텔리 도시여성이었으나 결혼생활 10년에 경상도 말을 잊어버리고 이제는 완전히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 남편 김용상씨(38)는 완도수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마을 이장으로 「잘사는 어촌만들기」에 전념하느라 장가도 못갔던 노총각. 물론 처녀 집안의 반대는 완강했다.
『7남매의 막내로 편하게만 살았던 네가 어떻게 섬으로, 그것도 전라도로 시집가 사느냐는 것이었지라.』 혹시 혼수를 장만해주지 않으면 중간에 포기할까 기대하며 부모가 TV 하나 마련해주지 않는 바람에 혼수 없는 건전 혼례를 치르게 됐다는 오씨는 주위의 반대가 오히려「악착같은」결심을 하게 했다고 말한다.
『신랑감이 약6개월간 편지로 구혼을 해왔는디 참 성실하고 신뢰감이 가지더랑께. 인연이지라.』
남편 하나만 믿고 시집왔으나 역시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파래·미역양식장을 갖고있던 남편을 따라 배타고 이들을 채취하러 가면 집채만한 파도가 집어삼킬 듯 달려들었다.
지금은 양식장을 팔고 남편은 양어장에, 오씨는 미역공장에 취직해 오전 5시30분부터 12시간의 고된일을 하지만 80세의 시어머니와 두아들의 건강함에 피곤도 잊는다. <문경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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