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송호근칼럼

죽어야 살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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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권력 내부의 진통이 한창인 요즘, 요지를 말씀드리면 '조금 물러앉으실 때가 되었다'는 겁니다. '고약한 소리, 남은 임기가 얼만데!'라고 호통쳐 봐야 5년 단임제가 그러기를 명하고 있습니다. '개혁' 깃발을 꽂으면 어디나 생살이 돋아날 것만 같았던 4년 전을 생각하면 기가 막힐 노릇일 겁니다. 아직 할 일이 태산 같고 충복들이 도열해 있어도, 남은 1년엔 후계자에게 길을 터주고 대리청정 수순을 밟는 것이 이치입니다. 설령 왕세자가 선왕의 치적을 일소해도 참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홍이 수습되고 집권세력도 변신의 계기를 찾게 됩니다. 요즘 목포에 자주 행차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은 DJ에 대한 애틋한 충심일 터이고, 분당(分黨)을 고심하는 열린우리당 지도부에 보내는 경고겠지요. 목포역에 도열한 노사모의 열렬한 환영과 '허벌나게 사랑합니다'라는 사랑 고백에 애간장이 다 녹겠지만, 다른 민심도 있음을 잘 아시겠지요. 때는 동지섣달도 지나고 그믐, 바야흐로 환국(換局)이 1년 남짓 합니다.

정치판을 뒤엎는 '환국의 고수'라 아직 득의양양하신 것으로 생각되오나, DJ는 임기 만료 1년 전에 용단을 내리셨고 그전 정치 9단들도 그랬습니다. '나를 밟고 넘어가라'고 자진(自盡)한 것이지요. 최근 두 분이 모여 농담처럼 주고받은 '정신이상론'은 현대판 종묘사직의 관습인 '후계자의 정당성 짓밟기'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것이 정치 발전을 도모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유혈낭자한 환국'은 막았지요. 멀리 갈 것도 없이, 한 20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천하의 무장이던 전두환 장군도 환국의 어지러움을 일찍이 간파해 애지중지하던 민자당을 후계자에게 넘겼습니다. 밀약을 했겠지요, '나 죽이지 말라'고. 후계자 노태우는 임기 중반에 벌써 YS에게 권좌를 물려주고 삼당 합당의 은막 뒤로 몸을 감췄습니다. 대가를 요구했겠지요. '나만 죽이지 말라'고. 민주화의 돌격대장 YS는 둘 다 죽이고 임기 1년 전에 탈당했습니다. 후계자인 이회창 후보가 한나라당을 창당하고 야단법석을 떨어도 묵묵히 지켜봐야 했습니다. 너무 죽어 조금 서운했겠지만 말입니다. DJ는 기회만 있으면 물러났던 사람입니다. 새롭게 돌아오기 위함이었지요. 1998년 그는 세 번째 돌아와 권좌에 올랐는데, 죽일 사람은 이미 다 죽은 다음이었습니다.

그런 그도, 2001년 말에 당적을 버렸습니다. 노벨상 수상으로 느긋해진 탓도 있겠지만, 사실은 5년 단임제의 수순을 밟고 있었던 게지요. 자신이 살길은 후계자가 뜨는 것이고, 후계자가 뜨려면 자신이 짓밟혀야 합니다. 외환위기 때 정운찬 전 총장이 일갈한 경제처방책 '죽어야 산다'는 논리는 사실은 정치에 더 들어맞습니다. 분당과 창당은 '죽어야 산다'는 한국적 권력론의 이행 논리일 뿐입니다. 5년 단임제에서는 '백년 정당'의 가약이 애초에 거짓임을 알고 계셨을 줄로 압니다. 그나마 요 몇 년 동안 공적비가 여기저기 세워졌더라면, 짓밟히는 통치자가 애처로워 백성들이 눈물이라도 흘리겠지요.

그런데 돌아보십시오. 집값에다 세금에다 민심이 흉흉하고, 농민군과 노동자군이 한양과 각도 도성에 집결해 연일 관군과 충돌하고 있습니다. 친위대들은 이미 해결 능력을 상실한 듯 보이고, 열린우리당의 결박이 풀리지 않으면 내홍은 반정(反正)으로 나아갑니다. 유별난 그 집착력으로 끝내 버티실 건지, 아니면 여야 정당들이 새 시대의 정치판을 짜도록 자연스럽게 물꼬를 터주실 건지 택일이 남았습니다. 아집정치는 언제나 종말이 비참하고 국운을 가로막습니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