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속 처녀의 죽음(촛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혹시라도 이런일이 있을까봐 난로불도 지피지 않고 나갔는데….』
9일 오후 11시 서울 풍납동 142 노경호씨(57)의 단칸 사글세방.
화재로 무너져내린 지붕의 기와조각 사이에서 외동딸 혜영양(27)의 시신을 찾아낸 순간,노씨의 깊게 팬 얼굴주름을 타고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 내렸다.
구청 토목과에서 노무자로 일하고 있는 노씨는 이날도 어김없이 오전 8시20분쯤 공장에서 일당 5천원의 삯일을 하는 부인과 함께 혜영양을 혼자 남겨두고 출근했다.
간질병을 앓아 거동이 불편한 혜영양이 잘못될까봐 방안에 있던 연탄난로도 꺼진채로 두었다.
혜영양이 처음 간질증세를 보인 것은 국민학교 2학년때.
두명의 오빠들 사이에서 재롱을 부리며 온 식구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혜영양이 어느 봄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발작증세를 일으킨 것이다.
치료를 해도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간질병이라는 의사의 진단이었지만 형편이 워낙 어려워 변변한 치료도 받게해줄 수 없었다.
영세민구제 단체인 「장미회」에서 지급하는 간질병치료제를 매달 타다 먹이는 것이 전부였다.
9일 오후 4시30분쯤 공사장에서 일을 하던중 집에 불이났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간 노씨가 본 것은 불에타 주저앉은 지붕사이로 피어오르는 연기뿐이었다.
미친듯이 달려들어 벽돌과 기와조각들을 들어낸 뒤 방옆에 딸린 부엌에서 웅크린채 숨져있는 혜영양을 찾아냈다.
추위를 못견딘 혜영양이 연탄난로불을 피우려다 불똥이 이불에 옮겨 붙어 불이 나자 불편한 몸을 끌어 부엌으로 피신하다 무너져내린 지붕에 깔린 것이었다.
『그 불쌍한 것이 얼마나 추웠으면….』
북받치는 노씨의 오열이 뚫린 천장사이로 들어오는 밤바람소리와 합쳐져 더욱 슬프게 들렸다.<이훈범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