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을 사고「스물」을 파는 지혜/김두겸(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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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서구사람들은 냉전체제가 붕괴된 1990년을 「21세기의 첫해」로 간주한다.
그래서 그들은 21세기를 살아남기 위해 그 첫해인 90년부터 새질서 구축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우리의 1990년은 어떠했나.
「총체적 난국」속에서 1년내내 허우적거렸던 한해였다고 말한다면 너무 가혹한 평가가 될까.
신도시아파트가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어도 그림의 떡인 것은 마찬가지다. 서민의 가치척도가 뿌리째 흔들려 버린지 이미 오래다. 물가는 10년래의 최고상승률을 기록했고 이 때문에 9%대의 고성장도 성에 차지 않는다.
내치의 실패는 엉뚱하게 그 책임이 국민에게도 떠넘겨졌다. 물가가 폭등하고 민심이 흉흉해진 것은 그모두가 국민의 과소비 탓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인식아래서 벌어진 과소비 추방 캠페인은 끝내 우방국으로부터 「경고친서」가 날아오는 수모까지 받게했다.
새해는 내외환경이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그러나 우리를 불안케 하는 것은 격변하는 내외정세가 아니다. 난국을 맞아 효율적으로 대처해야할 우리 지도층의 발상이 너무나 구태의연하다는 것이 내일을 더 어둡게 느끼게 하고 있다.
아직도 그들은 3공식,5공식 편의주의와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재임중 성과」에 급급한 나머지 연말에 가서 모든 공공요금을 한꺼번에 올려버리는 일­.
전형적인 편의주의적 발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부규제」의 강화는 권위주의적 발상의 산물이라는 지적도 있다. 6·29이후 한동안 개선되던 관주도 경제가 다시 살아나고 있는 추세다. 규제가 강하면 강할수록 시장경제,개인의 창의는 발붙일 곳이 없어진다. 이런 환경속에선 예의 「눈치경제」만 발달하고 민주화,개방화에 앞장서야할 기업가 정신은 질식하고 만다.
그 대표적 예로 과소비추방 캠페인이 빚어낸 「외국상품은 사지도 팔지도 않는다」는 구호를 꼽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이 국제화시대에 수입은 막으면서 어찌 우리상품만은 해외로 수출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 경제는 누가 뭐래도 「무역」없이는 먹고 살기 힘든 구조다.
무역확대를 위해선 상호개방이 전제가 되어야한다. 천신만고끝에 세계 13위 교역국으로까지 성장했는데 지금와서 다시 옛날로 되돌아가자는 논리나 다름없다.
우리는 과소비추방운동도 좋지만 지도층을 비롯,국민모두가 근검절약하는 우리의 옛 근면정신을 되찾도록 하자는 캠페인이 나오게해야 한다.
근검절약운동이 시민의 윤리관에 호소하는 것이라면 과소비추방 운동도 그 뿌리를 같이해야 한다.
사회의 위화감을 해소하기 위해 소비를 규제하기보다는 국민 스스로의 자각으로 이 일을 추진해 나가야 한다.
물론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아예 소비 할상품 자체를 만들지 조차 않는다. 빈부차는 필연적으로 소비의 불평등을 초래한다. 그 빈부의 차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계층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들만이 과소비가 가능한 거대한 이익을 얻고 있다.
소비의 불평등을 막기 위해서는 빈부의 차가 없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의 사유를 금지시켜 소비할 상품을 처음부터 생산하지 못하게 해야한다. 이처럼 사회주의 사회는 소비대상 상품을 생산에서부터 규제해 버린다.
이에 비해 전체주의 국가는 생산자체는 허용한다. 그러나 소비는 통제하고 규격화 시킨다. 좌익사회주의가 재산과 소득을 중시하는 「입구규제」라면 자본주의체제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기쉬운 소비에 착안하는 「출구규제」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좌익은 이론적,개념적인데 비해 우익은 감정적,구체적인 것이 다른 점이다.
지금까지 과소비규제 운동은 이같은 논리에서 보면 자칫 우익전체주의 발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정부가 스스로 선별해 생산·수입을 허가해 주고는 이를 소비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암행조사해 불이익 처분을 내린다면 자유경제를 신봉하는 나라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제 개각도 이루어져 새 인물들이 대거 새 내각에 포진했다. 새 내각은 무엇보다 먼저 국제화·개방화의 시각에서 「게임의 규칙」에 어긋나지 않게 어른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는 의견에 귀기울일줄 알아야 한다.
새 내각은 또 지금의 내우외환을 일으킨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똑바로 알아야 한다. 대내적으로 물가를 폭등시켜 가치의 척도를 혼란시켰고 대외적으로 과소비추방 운동까지 간여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켜 외부압력을 자초한 이유는 무엇인가.
불법과 비정상엔 무력하고 자유와 창의력을 신장시키는 정상적인 경제행위엔 규제를 가하는 그러한 통치방법으론 결코 21세기를 살아남지 못한다.
규제가 심한 나라,관리가 힘을 발휘하는 기업치고 발전한 예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세상엔 없다. 수입을 막기보다는 열을 사고 스물을 수출하는 적극적,전향적 자세가 소망스럽다.<국제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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