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대신 기억과 상상력으로 봐…훈련하면 뇌세포에 한계 없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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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1호 20면

[비욘드 스테이지] 빵터지는 코미디로 돌아온 송승환

중요한 회의를 할때 삼성전자의 시각장애인용 안경을 쓴다는 송승환은 제품 업그레이드에 피드백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는 “떨림현상과 선명도가 좀더 개선되어야 한다. 일반 안경처럼 가볍게 쓰게 될 날도 곧 올 것 같다”고 기대했다. 최기웅 기자

중요한 회의를 할때 삼성전자의 시각장애인용 안경을 쓴다는 송승환은 제품 업그레이드에 피드백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는 “떨림현상과 선명도가 좀더 개선되어야 한다. 일반 안경처럼 가볍게 쓰게 될 날도 곧 올 것 같다”고 기대했다. 최기웅 기자

뛰어난 연기력과 타고난 말빨을 갖춘 만능 엔터테이너. 공연사에 길이 남을 글로벌 히트작을 만들어 세계를 누비고 올림픽 개폐막식까지 총지휘한 최고의 프로듀서. 그런데 정상에 올랐을 때 눈앞이 흐려졌다. 한국의 ‘위대한 쇼맨’ 송승환 얘기다.

쇼는 비극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송승환은 ‘쇼 머스트 고 온(Show must go on)’을 외치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비극을 희극으로 바꿔가고 있다. 심지어 희극의 대명사 ‘웃음의 대학’ 무대에 올랐다. 전쟁 중에도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연극에 사활을 건 작가와 연극 따윈 필요 없다는 검열관이 벌이는 100분간의 해프닝이다. 최고의 공연제작자인 그가 검열관이 되어 시침 뚝 떼고 공연을 방해하는 아이러니에 객석은 빵빵 터진다. “대본을 보고 제작사에 먼저 연락을 했어요. 억지로 웃기지 않고 내 역할만 충실히 하면 관객이 웃을 수밖에 없는, 정말 잘 쓴 작품이라 탐이 나더군요.”

오직 두 사람의 대화만으로 객석을 들썩여야 하는, 호흡이 핵심인 무대다. 전방 30㎝ 안쪽의 사물만 보인다는 그가 상대 배우와 어떻게 호흡을 맞출까. “기억력과 상상력으로 봅니다. 실루엣만 보여도 내가 기억하는 사람들은 알아보는 것처럼, 훈련하면 돼요. 중요한 지점에선 리허설 때 상대 배우를 촬영해서 그 표정을 기억해 두고, 무대에선 그걸 상상하며 연기하는 거죠. 인간 뇌세포의 능력이 무한하다 싶어요.”

대본 보고 제작사에 연락해 출연 자청

사실 믿기 힘들었다. 테이블 너머로 마주 앉아 기자의 눈을 보며 대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의 눈을 보는 것도 일종의 연기였다. “눈코입은 안 보여요. 꼭 보려면 아이패드를 렌즈 삼아 보죠. 리허설도 아이패드로 줌인해서 보면서 했는데, 암전 때 등퇴장이 제일 어려워요. 내려올 때 떨어질 뻔한 일도 있어서 상대 배우의 도움을 받아야 하죠. 몇 발자국 가면 계단이란 걸 세어 놓지만, 그래도 위험하거든요. 나보다 먼저 퇴장한 작가 역 배우가 암전 후 다시 뛰어들어와 나를 부축해서 들어가죠. 깜깜한 속에서 사실 그게 더 코미디일텐데.(웃음)”

“이 없으니 잇몸으로 산다”는 그에겐 도구가 많았다. 아이패드를 몸에 다는 웨어러블과 손전등이 달린 지팡이는 직접 만들었고, 공연을 보거나 중요한 회의를 할 땐 삼성전자가 개발한 시각장애인용 안경을 오페라글라스처럼 쓴단다. “처음엔 셀프로 확대경을 만들어 썼는데, 삼성전자에서 시각장애인용 안경을 개발한다고 연락이 와서 내가 마루타가 됐어요. 아직 좀 어지럽고 무거워서 업그레이드를 계속해야 하거든요. 이런 걸 개발해 주는 것만 해도 감사하고, 보통 안경처럼 작고 가벼워질 날이 곧 올 것 같아요. 불편한 건 적극 해결책을 찾고 있어요. TV를 볼 때 자막을 읽어주는 서비스도 제가 건의해서 삼성에서 이번에 나왔고, 전자책은 AI가 읽어주니 스탠드 켤 필요도 없어서 좋죠. 휴대폰 문자메시지가 안 보이는 게 가장 답답했는데, 읽어 주는 기능이 있더군요. 이런 것들을 아무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으니 찾느라고 시간이 걸렸어요. 하지만 나름 발견의 기쁨이 있고, 세상에 없던 걸 만드는 재미도 있더군요.”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직후 황반변성과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각장애 4급 판정을 받은 그는 초기엔 어떻게든 고쳐보려고 했단다. 용하다는 한·중·일 의사를 모두 찾아가 치료를 받아도 효과는 없었다. “마지막에 미국의 망막전문 안과에서 누가 병을 고쳤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정말 큰 기대를 품고 갔어요. 거기서도 방법이 없다는 얘길 듣고 그날 밤새 혼자 펑펑 울었습니다. 근데 좌절감은 그렇게 털어냈어요. 다음날 아침 파란 하늘을 보는데 감사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더군요. 형체는 안 보여도 하늘이 보이는 게 어딘가요. 치료에 대한 희망은 접고, 이대로 살아갈 방법을 찾기로 했죠. 다행히 진행이 느려서 죽을 때까지 실명은 안 올거라네요.”

청춘스타로 누리던 최고 인기를 뒤로 하고 새로움을 찾아 뉴욕으로 떠날 만큼 천성이 진취적인 그다. 시각장애라는 위기도 송승환 답게 ‘도전’이라는 프레임으로 전환시켜 버렸다. “살다 보면 도전을 하게 되잖아요. 내게 첫 번째 도전은 ‘난타’였죠. 공연을 해외에 가져가 전용극장을 만든다는 게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두 번째는 올림픽 개폐막식이라는, 수억 명이 보는 가장 큰 공연을 만드는 거였고, 지금이 세 번째네요. 안 보이는 상황에서 어디까지 연기할 수 있을까 하는 거죠. 때마침 코로나까지 터져서 극장문도 닫고 사업적인 위기까지 겹쳤지만, 시간적 여유가 생기니 유튜브에도 도전하게 됐어요. 원로배우들 인터뷰 아카이브인데, 구독자가 26만이에요. 어려서부터 그분들과 촬영장에서 잡담하며 들은 재미난 얘기들이 많거든요. 1번이었던 오현경 선생이 얼마 전 돌아가셨는데, 기록이라도 남겨놔서 그나마 다행이었어요.”

그의 대학로 사무실에는 68년 연극 데뷔작 ‘학마을 사람들’로 받은 동아연극상 트로피와 82년 ‘에쿠우스’로 받은 백상예술상 트로피도 진열돼 있었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연기상이 없었다. ‘난타’ 이후 제작에 몰두했고, 연극 출연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2020년 ‘더 드레서’가 9년 만의 연극 복귀작이었으니, 시각장애가 그를 다시 무대로 불러온 셈이다. “이 눈으로 그나마 잘할 수 있는 일이 연기니까요. 그 중에서도 무대가 제일 좋아요. 집이나 사무실보다 무대라는 공간이 편하죠. 그 위에 있는 2시간만큼은 세상만사 다 잊는 선(禪)의 경지와 비슷하거든요. 고도로 집중해 몰입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의 카타르시스는 길어야 2~3분씩 집중하는 매체 연기와 비교할 수 없어요. 그래서 돈도 안 되는 연극을 하는 거죠.”

앞만 보며 달려오다 앞이 잘 보이지 않게 되니 뒤도 돌아보게 됐다. ‘용서’와 ‘감사’라는, 전에 없던 감성코드도 생겼단다. “‘더 드레서’에서 내가 맡은 늙은 배우가 ‘나한테 필요한 건 망각 뿐이야’라는 말을 하거든요. 자기 과오를 후회한다는 뜻인데, 나도 인생을 돌이켜 보게 되니 남들에게 잘못한 게 많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그런 기억을 잊고 싶고, 용서를 빌고 싶어요. 내가 이렇게 일해온 게 다 주변 사람들이 도와줘서 가능했던 거예요. 공연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하는 일이니까. 지금도 눈 나쁜 배우를 뭐 하러 캐스팅하냐고 하면 끝이고, 동료들도 나 때문에 성가실 텐데 기꺼이 도와주고 있잖아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하는 습관 들여

연극 ‘웃음의 대학’은 20주년을 맞은 연극열전의 대표작이다. [사진 연극열전]

연극 ‘웃음의 대학’은 20주년을 맞은 연극열전의 대표작이다. [사진 연극열전]

일본의 국민작가 미타니 고키의 대표작인 ‘웃음의 대학’은 평생 크게 웃어본 적 없는 무뚝뚝한 사람이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연극을 꿈꾸며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이야기다. 과연 있을 법한 일이냐 물으니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답한다. “올림픽 같은 행사에서 공무원들과 일하다 보면 처음엔 그 위치에서 할 말만 하거든요. 근데 같이 몇 달 작업하고 나면 전혀 공무원답지 않은 언어로 오히려 아이디어를 내기도 하는 걸 봤어요. 극중에 검열관이 이렇게 재밌는 세상이 있는 줄 몰랐다고 고백을 하면서, 징집되는 작가에게 ‘꼭 살아 돌아와서 연극을 만들어달라’고 하잖아요. 공권력의 끝자락에서 국가주의를 외치던 사람이 희극을 통해 인간성을 회복한 건데, 그게 바로 연극의 힘인 것 같아요. 이런 주제를 어떻게 이렇게 코믹하게 풀었을까요.”

1965년 라디오 드라마 ‘은방울과 차돌이’로 데뷔한 그는 올해로 60년차 배우다. 하지만 공연제작자로 더 큰 업적을 남긴 게 사실이다. “‘난타’로 보관문화훈장, ‘평창’으로 체육훈장 맹호장, 진보와 보수에서 다 훈장 받은 사람”이라며 웃는다. ‘K팝’이라는 말도 없던 시절 사물놀이를 재해석해 해외시장을 개척할 엄두를 어떻게 낸 걸까. “80년대 뉴욕에서 3년 살면서 많은 경험을 했거든요. 내가 가던 해에 뮤지컬 ‘캣츠’ ‘레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이 다 오픈했는데, 한국에선 뮤지컬이 아예 없을 때니 높은 벽을 실감했죠. 근데 3년쯤 되니까 내가 만들어도 이거보단 잘 만들겠다 싶은 것까지 보이더군요. 아래도 보이고 허점도 보이니 뉴욕이 두렵지 않게 된 거죠.”

10년 전만 해도 배우로, 연출로, 프로듀서로 종횡무진하며 “하루를 3일처럼 살기에 많은 일을 할수 있다”던 그가 이제 “하루를 하루로 살면 된다. 서두르지 않고 뭐든지 천천히 하는 습관을 들이고 있다”고 말하니 어딘지 쓸쓸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많은 일을 한다. 밤에 ‘웃음의 대학’ 공연을 하면서 낮에는 어린이뮤지컬 ‘정글북’ 제작에 돌입했고, 7월엔 올림픽 개폐막식 해설을 하러 파리로 간다. 9월엔 ‘한국의 에든버러 페스티벌’을 꿈꾸며 파주페어 북앤컬처 총감독으로 다시 나선다. “3년간 야심차게 준비한 축제예요. 재작년에 파주출판도시가 출판을 넘어 문화예술이 함께 하는 도시로 업그레이드하고 싶다고 내게 강의를 부탁하더군요. 가서 에든버러 페스티벌 얘기를 했죠. 당장 에든버러에 가자더군요. 다녀와서 1년 넘게 축제 마스터플랜을 짰어요. 사실 ‘난타’가 97년에 한국 공연사상 최초로 에든버러에 가서 생각지도 못한 좋은 기회를 많이 얻었는데, 그 뒤로 별다른 히트작이 없었잖아요. 후배들을 돕고 싶어서 프린지 부문을 만들었어요. 두 편을 선정해 에든버러 출전을 지원할 겁니다. 이 눈으로 힘들지 않냐구요? 배우만 하기에는 조금 심심하잖아요.(웃음)”

송승환은 천상 ‘위대한 쇼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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