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김경록의 은퇴와 투자

디폴트가 노후를 구하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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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디폴트 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은 지난 2022년 7월 5일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시행령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됨에 따라 7월 12일부터 도입되었다. 사진은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 현장 안착을 위한 퇴직연금사업자 간담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는 모습. 뉴스1

디폴트 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은 지난 2022년 7월 5일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시행령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됨에 따라 7월 12일부터 도입되었다. 사진은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 현장 안착을 위한 퇴직연금사업자 간담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는 모습. 뉴스1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

2003년 과학 저널 ‘사이언스’에 ‘디폴트가 생명을 구하는가?’라는 논문이 실렸다. 장기기증에 동의하는 비율을 국가별로 비교했더니 오스트리아, 프랑스, 헝가리, 포르투갈은 99%를 넘는데 독일은 12%, 덴마크는 4%에 불과했다. 이를 보고 프랑스, 포르투갈 사람들은 감성적이고 정이 많은 반면에 독일과 덴마크 사람들은 냉철한 이성을 가진 민족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차이는 디폴트(초기값)에서 비롯되었다.

장기기증에 동의하는 비율이 높은 나라는 디폴트를 ‘장기기증 동의’로 두고, 별다른 의사표시를 하지 않으면 장기기증에 동의한 것으로 보며, 동의하지 않으면 거부 의사를 표시하게 한다. 반면에 장기기증에 동의하는 비율이 낮은 나라는 장기기증 동의나 거부를 본인이 선택하게 하는 방식을 썼다. 이 하나의 차이로 장기기증에 동의하는 비율이 엄청나게 차이 난 것이다. 디폴트의 힘이다.

미국의 퇴직연금 디폴트 옵션
미 근로자들 노후 안정에 기여
우리나라 왜곡된 디폴트 문제
90%가 원리금 보장상품 선택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디폴트는 다방면에서 활용된다. 컴퓨터 화면보호기는 아무 조치도 하지 않으면 컴퓨터 회사에서 디폴트로 설정한 화면보호기를 사용하게 된다. 이 화면보호기가 싫으면 구매자가 바꾸면 된다. 서비스를 구독할 때 3개월 시험적으로 사용하게 하고, 3개월이 지나서 아무 의사표시를 하지 않으면 구독하는 것으로 디폴트를 설계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연금시장도 디폴트가 긴요하게 쓰이는 곳이다. 미국의 퇴직연금 401(k)는 퇴직연금에 가입할 때와 포트폴리오를 선택할 때 디폴트 옵션(자동가입)을 채택하고 있다. 근로자가 별다른 의사표시가 없으면 401(k)에 자동 가입되고 퇴직연금상품도 자동으로 적격 디폴트 상품이 선택된다. 401(k)의 디폴트, 즉 초기값이 ‘퇴직연금 가입’과 ‘적격 디폴트 상품 가입’인 셈이다. 본인이 가입하기 싫으면 의사표시를 하면 된다.

이러한 디폴트 옵션(default option)은 401(k)의 가입률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디폴트 옵션이 없을 경우 고용 3개월 후 가입률이 20%, 3년 후 가입률이 65%였으나 디폴트 옵션을 도입하고 난 후는 이 값이 각각 90%와 98%로 껑충 뛰었다. 퇴직연금 가입 시기를 앞당기고 가입률을 극적으로 높이는 효과를 보였다. 401(k)의 운용상품 역시 많은 근로자가 생애 자산 배분에 최적인 TDF(Target Date Fund)를 선택하게 되었다. 근로자는 아무 선택을 하지 않았는데 최적의 결과가 나타났다. 디폴트는 미국 근로자의 노후를 구한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디폴트 옵션을 작년 7월부터 ‘사전지정운용제도’라는 이름으로 도입했다. 그런데 의사표시가 없으면 투자상품이 자동으로 선택되는 디폴트 옵션과 달리 우리의 사전지정운용제도는 근로자가 사전에 적격상품을 지정해야 한다. 크게는 초저위험(원리금 보장 상품), 저위험, 중위험, 고위험 상품 중 하나를 우선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디폴트 옵션의 본질과는 다르다.

고용노동부의 디폴트 옵션 상품 현황 첫 공시(2023년 1분기 기준)에 따르면, 초저위험에 가장 많은 적립금이 유입되었다. 사진은 서울 시내의 시중은행 ATM기기 모습. 뉴스1

고용노동부의 디폴트 옵션 상품 현황 첫 공시(2023년 1분기 기준)에 따르면, 초저위험에 가장 많은 적립금이 유입되었다. 사진은 서울 시내의 시중은행 ATM기기 모습. 뉴스1

디폴트 옵션은 ‘내가 무엇을 선택하지 않아도 최적의 연금 상품을 내게 준다’는 데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런데 내가 선택을 해야 한다면 디폴트 옵션의 전제를 위반하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선택해야 하는 상품 중에는 생애자산관리에 부적합한 원리금 보장 상품(초저위험)도 있다. 그러다 보니 2023년 말 기준으로 사전지정운용제도 가입자의 90%가 낮은 금리의 원리금 보장 상품을 선택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디폴트가 노후를 살리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사전지정운용제도 상품은 전문가들이 적격성 심사를 통해 검증했기에 다른 상품들보다 신뢰성이 있으며 각 금융기관의 대표상품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는 진일보했다. 하지만 원리금 보장 상품을 선택하는 비중이 90%에 이를 정도로 압도적으로 높다면 적격성 심사의 실익도 크지 않다. 원리금 보장 상품은 상품의 차별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10% 정도의 원리금 비보장 상품에서 적격성 심사의 긍정적인 면이 나타날 따름이다.

혹자는 디폴트 옵션에서 원리금 보장 상품 선택 비중이 높은 것은 투자상품의 수익률이 경쟁력이 없기 때문이며, 만일 중위험과 고위험 상품의 수익률을 확실하게 높이면 사람들이 이를 선택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아니다. 장기적으로 주식수익률이 가장 좋은 미국도 이게 안 되기에 401(k)에 디폴트 옵션을 도입한 것이다. 투자시장은 속성상 출렁이기 마련인데 단기적 관점을 가진 연금 가입자들이 장기적 미래를 보고 출렁이는 시장을 선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전지정운용제도를 도입한 지 1년이 다 되어 가지만 원리금 보장 상품 선택은 견고하다. 우리나라 디폴트 옵션은 제도를 도입할 때 모나지 않으려 하다 보니 회색이 되어버렸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라이언 일병은 스스로 탈출해야 하는가?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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