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아들 납치" 통화, 화장실 옆칸서 말렸다…'보피' 감시하는 시민들

중앙일보

입력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전기통신금융사기 통합신고대응센터에서 열린 보이스피싱 상담원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뉴스1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전기통신금융사기 통합신고대응센터에서 열린 보이스피싱 상담원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뉴스1

“창고에 갇혔다고?”
지난 14일, 서울 중랑구 보건소에서 평소처럼 공공근로 업무를 하던 조은경(64)씨는 화장실 옆칸에서 들리는 통화 소리를 듣고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인지했다. 화장실 옆칸에서 나온 중년 여성은 평범한 보육교사 A씨였다. 조씨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으나 A씨는 혼비백산 한 채 “아들이 납치됐다”는 말만 남기고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보이스피싱임을 직감한 조씨는 A씨를 쫓아다니며 손으로 엑스자 모양을 만들어 전화를 끊으라고 했다.

그러나 A씨는 말을 듣지 않은 채 더욱 전화에 매달렸다. 조씨 신고로 5분 만에 경찰이 현장으로 왔으나 A씨는 경찰의 말도 듣지 않았다. 추후 경찰 10여 명이 동원되고, A씨 아들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 된 후에야 A씨는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중랑경찰서는 20일 조씨에게 보이스피싱 범죄 예방 공로로 표창장과 포상금을 수여했다. 조씨는 “납치·감금이 드라마에나 나오는 일이라고 생각해 당장 보이스피싱이 떠올랐다. 경찰이 빨리 출동해 피해를 줄여 다행”이라고 했다.

중랑경찰서는 지난 20일, 보이스피싱 예방에 앞장선 시민에게 표창장과 포상금을 수여했다. 가운데가 표창장을 받은 조은경(64)씨, 오른쪽은 이규탁 중랑경찰서 범죄예방대응과장. 조씨의 동료인 중랑구 보건소 직원들이 동행했다. 중랑경찰서 제공.

중랑경찰서는 지난 20일, 보이스피싱 예방에 앞장선 시민에게 표창장과 포상금을 수여했다. 가운데가 표창장을 받은 조은경(64)씨, 오른쪽은 이규탁 중랑경찰서 범죄예방대응과장. 조씨의 동료인 중랑구 보건소 직원들이 동행했다. 중랑경찰서 제공.

보이스피싱 범죄가 국내에서 처음 발생한지 18년이 지나면서 시민들에 의한 예방사례가 늘고 있다. 시민 사회 전반에 일종의 ‘보이스피싱 면역체계’가 생겼다는 분석이 나온다. 안산에서 30년째 택시 운전을 해온 김모(65) 씨는 지난 3월 자신의 택시에 탄 70대 남성 B씨가 수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목격했다. 오전 9시쯤 택시에 탄 B씨는 까만 마스크를 쓴 채 얼굴을 가리고 끊임없이 문자를 주고 받은뒤, 인기척 없는 공단 한 가운데에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수상한 기운을 감지한 김씨는 “돌아올 때 택시 잡기 힘들 텐데 내가 기다려주겠다”고 제안했다. B씨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인근 편의점에 들른 뒤 다시 택시에 올라탔다.

그런데 택시에 내릴 때는 홀쭉했던 작은 가방은 B씨가 택시에 다시 오를 때 뚱뚱해져 있었다. 보이스피싱 인출책임을 직감한 김씨는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경찰에 신고했다. B씨가 택시요금을 카드로 계산하도록 유도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초밥집에서 혼자 식사 중이던 B씨를 붙잡았다. 보이스피싱 피해금액 3000만원도 회수했다. 김씨는 “보이스피싱은 사회적으로 해악이 큰 범죄고, 사기 당한 사람이 죽고 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반드시 잡아야겠다는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에는 서울 개봉동의 한 은행 직원이 “보이스피싱 피해자로 의심되는 고객이 현금 3000만원을 인출하려 한다”고 신고하면서 보이스피싱 피해를 막는 일도 있었다. 온라인에서는 보이스피싱 범죄자들을 놀리는 내용의 콘텐츠가 인기를 끌고 있다. 딸인 척 사칭하는 보이스피싱범에게 "나는 자녀가 없다"라고 답하거나, 기프트카드를 결제해달라는 요청에 "네가 저지른 일은 네가 처리하라"며 매정하게 답하는 식이다.

김영희 디자이너

김영희 디자이너

2022년 통계청이 발간한 ‘보이스피싱 현황, 유형, 추이와 대응관련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06년 최초로 발생한 이후 보이스피싱 범죄는 2021년까지 누적 27만 8200건이 발생했고, 피해금액은 누적 3조 8681억원에 달했다.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보이스피싱 피해자는 고령층 뿐만 아니라 전 연령층에 고르게 퍼져있을 정도로 일상적인 범죄가 됐다. 경찰청에 따르면 보이스피싱 발생건수는 2019년 3만 7667건을 기록한 후로 조금씩 줄어들어 지난해 1만 8902건까지 줄었지만 해마다 4000억원 이상의 범죄 피해액을 기록하며 서민 범죄의 대표주자로 자리잡았다.

백의형 경찰청 피싱범죄수사계장은 “피싱범들은 피해자들에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전화를 받으라’는 등 고립을 강요해 주변 도움을 차단하는 수법을 쓴다”며 “이 때문에 범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경찰은 보이스피싱 피해가 예상되는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고 신고할 수 있게 시민들을 상대로 홍보 활동을 벌일 예정이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부 교수는 “경찰이 모든 국민에게 항상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게 아니다보니 주변 사람들, 지역사회가 서로 관심을 기울여 범죄를 예방하는 일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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