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예타 전면폐지, 투자규모 대폭 확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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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0호 01면

윤 대통령 주재 국가재정전략회의

윤석열 대통령은 17일 “성장의 토대인 연구개발(R&D) 예비타당성조사(예타)를 전면 폐지하고 투자 규모를 대폭 확충하라”고 지시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정부세종청사에서 ‘2024년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이같이 밝혔다. 그동안 정부 차원에서 R&D예타 완화나 선별적 면제는 언급된 적이 있지만 R&D 분야에 한해 예타를 전면 폐지하기로 한 것은 상당히 전향적인 조치로 받아들여진다. 국가재정전략회의는 내년도 예산안과 중기 재정 운용 방향을 논의하는 최고위급 회의체다. 이 회의에서 제시된 방향성에 따라 내년도 예산안이 편성된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R&D예타 전면 폐지에 대해 “전 세계 주요 국가들이 첨단 분야에서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자칫 예타에 발목 잡혀 R&D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을 경우 기술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는 게 윤 대통령의 생각”이라고 전했다. 현재 총사업비가 500억원(국비 300억원) 이상인 재정 사업을 진행하려면 수개월에 걸친 예타를 거쳐야 한다. 과학기술계에서는 빠른 기술 변화에 발맞춰 R&D예타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이어져 왔다. 정부는 올해 삭감됐던 R&D 예산도 내년엔 역대 최고 수준으로 늘릴 방침이다. 〈중앙일보 5월 13일자 1면〉

윤 대통령은 저출생 극복을 위한 재정 사업에 대해서도 전면 개편을 지시했다. 윤 대통령은 “국가의 존립과 직결된 국가적 비상사태인 저출생 극복을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며 “실질적인 출산율 제고를 위해 재정 사업의 구조를 전면 재검토해 전달 체계와 집행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6년 이후 총 370조원에 달하는 저출생 대응 예산이 투입됐지만 구조적 비효율 탓에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고, 부처 간 칸막이로 중복·낭비되는 예산도 적지 않다는 게 윤 대통령의 인식이다.

윤 대통령은 마무리 발언에서도 “우리 사회에 비효율적인 소모적 경쟁이 지나치게 많다 보니 출산 의지가 꺾이게 된다”며 “저출생 개선 정책을 만들 때 범사회적 인식 제고 작업도 함께 고려돼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저출생 문제를 담당해온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정식 부처인 저출생대응기획부로 승격하고 저출생부 장관이 사회부총리를 맡게 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대통령실에 저출생 대응 기획을 담당할 저출생수석실도 신설한다. 이날 전략회의에서는 기초연금을 윤 대통령 임기 내 40만원까지 인상하는 목표도 세웠다.

“저출생 재정사업 구조 재검토, 반도체 초격차에 10조 지원”

윤석열 대통령(가운데)이 17일 오후 세종특별자치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2024년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시스]

윤석열 대통령(가운데)이 17일 오후 세종특별자치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2024년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시스]

17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윤석열 대통령 주재로 열린 ‘2024 국가재정전략회의’는 ▶민생 안정 ▶역동 경제 ▶재정 혁신 등 3개 세션에 걸쳐 3시간30분 동안 진행됐다. 민생 안정 세션에선 약자 복지 및 의료 개혁, 청년 지원 방안 등이 주된 의제로 다뤄졌다. 윤 대통령은 “약자 복지 정책도 업그레이드해서 보다 촘촘하고 두텁게 만들어야 한다”며 “취약 계층에게는 기초연금과 생계급여를 계속 늘려 생활의 짐을 덜어드리겠다”고 말했다.

기초연금은 65세 이상 소득 하위 70% 노인에게 매달 일정 금액을 지급하는 노후 소득보장제도 중 하나다. 박근혜 정부 출범 초기인 2014년 7월 기초연금을 도입할 당시에는 월 최대 20만원을 지급했지만 이후 금액이 불어나 2021년부터는 월 30만원을 주고 있다. 정부는 이를 40만원까지 올리겠다는 방침이다. 정부는 기초연금 10만원 인상을 통해 노인 빈곤율이 5%포인트가량 낮아질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정부는 윤 대통령 임기 내 기준 중위소득의 30% 이하인 생계급여 대상자도 35%까지 단계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의료 분야와 관련한 5대 핵심 재정 사업에도 예산을 집중하기로 했다. 윤 대통령은 “국민께서 바라고 계신 의료개혁 완수를 위해서도 보다 적극적인 재정 전략이 필요하다”며 “필수의료 전공의 지원 체계, 지역의료 혁신 투자, 필수의료 기능 유지,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 필수의료 R&D 확충” 등을 언급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전공의 수련 내실화와 처우 개선을 통해 전문의를 양성하고 의학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투자를 우선순위에 올린다는 방침이다. 특히 의대 정원이 대폭 늘어난 지역 거점 대학에 집중 투자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을 위한 보상 재원을 확충하고, 거점병원 등 대학병원의 연구 기능 강화와 첨단 바이오헬스 생태계 구축을 위해 혁신형 보건의료 R&D에 대한 예산 지원도 추진하기로 했다. 의료사고 안전망을 위해서는 전공의 책임보험·공제 비용의 50%를 지원하고 불가항력적인 분만 의료사고의 보상 한도를 상향하기로 했다.

청년 지원도 강화한다. 윤 대통령은 “우리의 미래인 청년들을 위해서도 더 각별한 정부의 노력이 필요하다”며 “부모의 형편이 어려운 학생도 마음껏 공부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대폭 확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국가장학금 수혜 대상을 현재 100만 명에서 150만 명까지 늘려나갈 계획이다. 또 주거장학금을 신설해 연간 240만원을 지원하고 근로장학금 수혜 대상도 12만 명에서 20만 명까지 늘리기로 했다.

‘역동 경제’ 세션에서는 R&D 지원 강화 외에 반도체 산업 초격차 확보 지원 등이 논의됐다. 정부 관계자는 “초격차 기술 경쟁력과 인재 확보를 통해 국가 간 경쟁에서 선도적 위상을 구축하는 게 절실한 상황”이라며 “반도체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정책 금융과 민간 펀드 등을 통해 최소 10조원 규모의 지원 프로그램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1월 평택·화성·용인 등 경기 남부에 세계 최대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조성 구상을 밝힌 윤 대통령은 지난 9일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도 “시간이 보조금이란 생각으로 규제를 풀겠다”고 밝힌 바 있다.

문제는 재정이다. 올해 들어서도 지난 1~3월 기준으로 세수 여건이 크게 개선되지 않은 상황에서 ‘건전 재정’ 기조 하에 총지출 증가율을 최대한 억제하다 보니 수입과 지출 양면에서 재정 압박이 가해지는 상황이다. 윤 대통령도 이날 “앞으로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신규 정책 재원은 고스란히 기존 예산의 효율화를 통해 조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윤 대통령은 “정부가 할 일이 태산이지만 재원은 한정돼 있어 마음껏 돈을 쓰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정부 재정을 살펴볼 때면 빚만 잔뜩 물려받은 소년 가장과 같이 답답한 심정이 들 때가 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각 부처 장관들에게 “부처 예산을 편성할 때 키워야 하는 사업과 줄여야 하는 사업을 잘 구분해 달라. 국가 차원에서 추진하는 사업은 최우선으로 편성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최상목 경제부총리는 회의에서 “부처별로 사업 타당성 전면 재검토 등 덜어내는 작업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며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면서도 당면한 민생 과제 등 정부가 해야 할 일에는 충실히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회의에는 국민의힘 지도부와 국무위원 전원, 대통령실 참모진 등 90여 명이 참석했다. 회의장 배경에는 ‘알뜰한 나라 살림, 민생을 따뜻하게’라고 쓴 걸개가 내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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