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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와 사색] 옛날 사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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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3호 34면

옛날 사람
곽효환

때론 사랑이 시들해질 때가 있지
달력 그림 같은 창밖 풍경들도 이내 무료해지듯
경춘선 기차 객실에 나란히 앉아 재잘거리다
넓은 어깨에 고개를 묻고 잠이 든 그 설렘도
덕수궁 돌담길 따라 걷던 끝날 것 같지 않은 그 떨림도
북촌마을 막다른 골목 가슴 터질듯 두근거리던 입맞춤도
그냥 지겨워질 때가 있지
그래서 보낸 사람이 있지

세월이 흘러 홀로 지나온 길을 남몰래 돌아보지
날은 어둡고 텅 빈 하늘 아래 드문드문 가로등불
오래된 성당 앞 가로수 길에 찬바람 불고
낙엽과 함께 뒹구는 당신 이름, 당신과의 날들
빛바랜 누런 털, 눈물 그렁그렁한 선한 눈망울
영화 속 늙은 소 같은 옛날 사람
시들하고 지겨웠던, 휴식이고 위로였던 그 이름
늘 내 안에 있는 당신

이제 눈물을 훔치며 무릎을 내미네
두근거림은 없어도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지도에 없는 집』 (문학과지성사 2010)

얼마 전 도서관에 갔다가 이제 일곱 살이 되었다는 한 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림책에서 시작한 대화 주제는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에 이어 놀이공원에 관한 것으로 흘렀습니다. 놀이공원에 가본 적이 있냐는 저의 질문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고는 아주 옛날에 갔었다고 했습니다. ‘옛날’이라는 말을 길게 힘주어 발음하는 모습이 재미있어 한참을 웃었습니다. 알고 보니 아이가 말한 옛날은 다섯 살, 그러니 두 해 전의 일이었습니다. 일곱 살 아이에게는 엄연히 먼 과거겠지요. 동시에 조금 먹먹해졌습니다. 아이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옛날을 만들어가야 할까요.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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