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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3600억 사기재판 중 또 범죄…'구속 최장 반년' 틈새 노렸다

중앙일보

입력

재판 중 구속 기간이 만료돼 석방된 피고인이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현행법상 1심 재판 중인 피고인의 구속 기한은 최장 6개월로, 재판이 이보다 길어지면 판결이 나기 전 풀려날 수 있다. 하지만 구속 기간 만료자는 보석으로 풀려난 경우와 달리, 거주지 제한이나 공범 접촉 금지 같은 제한이 없어 추가로 범행을 저지르기 쉽다는 우려가 나온다. 법조계 등에선 재판 중 구속 기간을 늘리는 방안을 두고 찬반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컨설팅업체 A사를 운영한 서모씨는 2018년 5월부터 2021년 6월까지 5213명에게 3605억1600여만원을 편취한 혐의로 지난 2021년 12월 구속기소됐다. A사 대표로 투자자를 모집하고 있는 서씨. 독자 제공

컨설팅업체 A사를 운영한 서모씨는 2018년 5월부터 2021년 6월까지 5213명에게 3605억1600여만원을 편취한 혐의로 지난 2021년 12월 구속기소됐다. A사 대표로 투자자를 모집하고 있는 서씨. 독자 제공

28일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컨설팅업체 A사를 운영한 서모씨는 특정경제범죄법상 사기 등 혐의로 지난 2021년 구속기소 됐다. 2018~2021년 5213명에게 3605억 1600여만원을 편취한 혐의다. 서씨는 투자설명회를 여러 차례 개최하고 투자자들에게 유망한 기업에 투자 시 원금 보장에 월 2% 이자를 지급하는 단기채권이 있다고 속인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은 서씨가 신규 투자금으로 기존 투자자들에게 채권 이자를 지급하는 식의 폰지 사기를 벌였다고 봤다.

서울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는 지난 2021년 12월 특정경제범죄법상 사기 혐의로 서씨를 구속송치했다. 800억 상댕의 금품을 몰수, 추진하기도 했다. 서울경찰청 제공

서울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는 지난 2021년 12월 특정경제범죄법상 사기 혐의로 서씨를 구속송치했다. 800억 상댕의 금품을 몰수, 추진하기도 했다. 서울경찰청 제공

앞서 지난 2021년 수사에 착수한 서울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현 형사기동대)는 같은 해 6월 A사를 압수수색하고 A사 계좌를 동결했다. 주식과 콘도 회원권 등 832억원 상당의 범죄 수익도 몰수·추징 보전됐다. 경찰은 그해 12월 서씨를 구속 송치했고, 서울중앙지검 형사4부는 서씨를 같은 달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겼다.

하지만 1심 재판은 2년 3개월째 공전 중이다. 그 사이 재판부는 세 번 바뀌었다. 피해자가 많아 심문할 증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사이 서씨의 구속 기간은 만료됐고, 서씨는 지난 2022년 6월 27일 풀려났다. 형사소송법 제92조 등에 따르면, 피고인의 구속 기간은 기본 2개월이고 구속을 계속할 필요가 있는 경우 심급마다 2개월 단위로 구속기간을 갱신할 수 있다. 1심에선 최장 6개월, 2·3심에선 8개월까지 가능하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서씨는 구속기간 만료로 출소한 뒤 ″피해를 변제하겠다. 아내 명의 C사 단기채권에 투자하라″고 말했다. 채권만기가 지났지만 원금을 돌려 받지 못한 피해자들은 경찰에 서씨를 사기 혐의로 고소했다. 독자 제공

피해자들에 따르면 서씨는 구속기간 만료로 출소한 뒤 ″피해를 변제하겠다. 아내 명의 C사 단기채권에 투자하라″고 말했다. 채권만기가 지났지만 원금을 돌려 받지 못한 피해자들은 경찰에 서씨를 사기 혐의로 고소했다. 독자 제공

문제는 얼마 뒤 풀려난 서씨가 또 다른 사기 범죄를 저질렀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일어났다. 지난 25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부장 우인성)가 연 서씨 재판에서 방청석에 앉은 피해자들은 “서씨를 다시 구속해달라”고 외쳤다. 이들은 “서씨가 풀려난 뒤 피해 변제를 목적으로 부인 명의의 B사와 자신이 레이싱 선수로 소속됐던 C사의 단기 채권에 투자하면 원금을 보장하고 월 10% 이자를 지급하겠다고 했지만 원금을 돌려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피해자 측에 따르면 추가로 제기된 사기 피해액은 20억원에 달한다.

서울 용산경찰서는 다음 달 4일 B사 피해자를 조사하고, C사 피해자는 다음 주 중 경기남부경찰청에 서씨에 대한 고소장을 제출한다. 서씨가 주당 2만원인 비상장 회사 주식이 상장되면 4~5만원 오른다고 했지만 상장이 되지 않아 500원대로 폭락한 사건에 대해서도 수사기관에 의뢰할 예정이다. 서씨 측은 중앙일보에 “정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중이다”고 말했다.

구속 만기로 2022년 6월 출소한 서씨는 C사 레이싱 선수로 출전하면서, C사 단기 채권 투자를 몇몇 피해자에게 권유했다. C사 피해자들은 서씨를 다음주 중으로 경찰에 고소할 예정이다. 독자 제공

구속 만기로 2022년 6월 출소한 서씨는 C사 레이싱 선수로 출전하면서, C사 단기 채권 투자를 몇몇 피해자에게 권유했다. C사 피해자들은 서씨를 다음주 중으로 경찰에 고소할 예정이다. 독자 제공

서씨처럼 판결 전 구속 기간이 만료된 피고인이 또다른 범죄 의혹에 휘말린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사기 혐의로 재판을 받던 중 지난 2022년 7월 구속 기간이 만료돼 풀려났던 하모(29)씨는 콘서트 티켓 사기를 또 저질러 다시 구속됐다. 대전지법 천안지원은 167회에 걸쳐 콘서트 티켓 판매 사기를 벌여 5500여만원을 편취한 혐의로 하씨에게 지난해 9월 징역 3년 6개월 형을 선고했다.

법조계에선 6~8개월로 제한되는 피고인 구속 기간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일본은 피고인의 재범 위험이 클 경우 구속 기간을 한 달 단위로 무제한 연장할 수 있다. 미국은 수사·재판 단계에서, 영국은 재판 단계에서 구속 기간을 제한하지 않는다.

김한규 변호사는 “다중 피해를 야기한 경제사범이 석방돼 추가 범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며 “수만 페이지의 기록과 수십명의 증인으로 지연되는 재판에선 구속 기간 연장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원상 조선대 법학과 교수도 “구속 기간이 만료된 피고인이 석방 뒤 공범과 입을 맞추는 등 고도화한 범죄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어려울 수 있고, 여러 차례 추가 기소를 하는 ‘쪼개기 기소’ 같은 편법을 막아 오히려 피고인에게 유리한 점도 있다”고 말했다.

재판이 장기화되면 피고인 구속기간 만료로 인해 보석을 허가하는 경우가 있다. '대장동 로비 의혹'으로 구속기소됐던 박영수 전 특별검사가 지난 1월 보석으로 석방됐다. 뉴시스

재판이 장기화되면 피고인 구속기간 만료로 인해 보석을 허가하는 경우가 있다. '대장동 로비 의혹'으로 구속기소됐던 박영수 전 특별검사가 지난 1월 보석으로 석방됐다. 뉴시스

반면 피고인의 방어권 등을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양홍석 변호사는 “피고인 구속 상태가 장기화하는 사건은 드물기 때문에 인권과 방어권을 침해할 우려가 이익보다 더 크다”며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자발찌 부착 등 조건부 보석을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김성룡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재판 건수에 비해 판사가 부족해지고, 검찰 조사 과정에서 작성된 피의자 신문 조서의 증거능력이 제한되면서 재판에서 직접 신문해야 하는 경우가 늘었다”며 “재판이 지연되는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해야 하는데 손 쓰기 가장 쉬운 피고인 구속 기간 연장부터 고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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