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거란전 승리 후 권위 세우려 아버지 과거 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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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현종, 고려의 중흥군주

이익주 역사학자

이익주 역사학자

조선에 ‘태정태세문단세’가 있다면, 고려에는 ‘태혜정광경성목’이 있고, 목종 다음이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으로 유명해진 현종(재위 1009~1031년)이다. 고려의 제8대 국왕이며, 거란과의 전쟁 중 나주까지 피난하는 수고를 마다치 않았고, 72세의 노장군 강감찬을 최고 지휘관으로 발탁해서 귀주 대첩을 이끌어낸 국왕이다. 고려 역사는 이 전쟁을 기점으로 초기와 중기가 나뉜다고 할 정도지만, 현종 개인으로도 두 차례 전쟁을 거치며 놀랄 만큼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18세에 처음 왕이 되어서 28세에 전쟁이 끝났으니, ‘고려 거란 전쟁’은 청년 현종의 성장 기록이기도 하다.

 과부 헌정왕후, 삼촌 왕욱을 사랑
자유분방 고려왕실도 왕욱 유배

왕욱의 아들 현종 어부지리 즉위
전쟁 치르며 어엿한 군주로 성장

중앙집권 완료, 고려 중흥 이끌어
아버지 유배 지워 출생 약점 숨겨

막장 드라마 같은 왕실의 사랑

최근 종영한 KBS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 나온 현종의 모습. [사진 KBS 캡처]

최근 종영한 KBS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 나온 현종의 모습. [사진 KBS 캡처]

현종은 출생부터가 얘깃거리다. 아버지는 태조의 아들 왕욱, 어머니는 태조의 손녀이자 경종의 부인인 헌정왕후 황보 씨였다. 이 짧은 문장 속에는 고려 초 왕실 혼인에 관한 낯선 사실이 여럿 담겨 있다. 경종도 태조의 손자이므로 경종과 헌정왕후의 결혼은 4촌 간의 근친혼이었다. 근친혼에 대한 인식이 지금은 안 좋지만, 그땐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경종이 죽은 뒤 과부가 된 헌정왕후가 궁궐 밖으로 나와 살다가 마침 옆집에 살던 삼촌 왕욱과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 사이에서 아이가 생겼다. 왕실 내의 이러한 자유연애(?)는 아무리 자유분방한 고려 초라고 해도 용납되기 어려웠다. 게다가 당시 국왕 성종은 유교 윤리를 퍼트리는 데 힘쓴, 도덕적으로 진지한 사람이었다. 성종에 의해 왕욱은 즉시 사수현(경남 사천)으로 유배되었다. 게다가 헌정왕후 마저 출산과 동시에 세상을 떠났다.

현종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는 멀리 유배지에 있어 고아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성종이 거두어 궁중에서 키웠는데, 두 살 때까지 유모가 ‘아빠’라는 말만 가르쳤다. 아이는 성종을 보고도 ‘아빠’를 불러댔고, 성종은 아이를 가엾게 여겨 사수현으로 보내 아버지와 함께 살게 했다. 아마 왕욱이 아들을 곁에 두기 위해 유모를 사주했을 것이다. 3년 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은 다시 혼자가 되었고, 여섯 살 때 개경으로 돌아와 대량원군이란 이름을 받았다. 하지만 그 뒤로 견제를 받아 목숨을 부지하기조차 힘든 신세가 된다.

헌정왕후에게는 비슷한 삶을 산 언니가 있었다. 경종비 헌애왕후로, 자매가 모두 경종의 부인이었다. 헌애왕후는 왕자를 낳았고, 이 아들이 성종에 이어 왕이 된 목종이다. 목종은 심약한 사람이어서 헌애왕후가 태후로서 섭정을 했는데, 천추전에 거처했으므로 천추태후라고 불렸다. 천추태후는 외간 남자 김치양과 사랑에 빠졌고, 아들까지 낳았다. 이 또한 불륜이었지만, 태후의 뜻을 거스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아들은 어머니 쪽으로 왕실의 피가 섞였으므로 엄연한 용손(龍孫)이었고, 천추태후는 이 아들로 후계자를 삼으려 했다.

1011년(현종 2년) 진관대사가 창건한 서울 은평구의 진관사. 진관대사는 현종이 왕이 되기 전 신혈사에 있을 때 목숨을 구해 준 승려로 알려져 있다. [사진 이익주]

1011년(현종 2년) 진관대사가 창건한 서울 은평구의 진관사. 진관대사는 현종이 왕이 되기 전 신혈사에 있을 때 목숨을 구해 준 승려로 알려져 있다. [사진 이익주]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29명의 부인으로부터 25명의 아들을 두었지만 건국 초 거듭된 정쟁 속에 희생되어 증손자 대에는 왕실의 씨가 마를 정도였다. 결국 출생에 약점이 있는 두 사람, 대량원군과 천추태후-김치양 소생(이름도 남아 있지 않다)이 왕위를 다투게 되었다. 천추태후는 열두 살이던 대량원군을 강제로 승려를 만든 다음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삼각산(북한산)의 신혈사로 옮기게 하고는 사람을 보내 죽이려고 했다. 태후가 보낸 떡과 술을 먹지 않고 버렸더니 까마귀와 참새가 먹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대량원군이 살해 위협을 받는 동안 목종의 정치는 불안하고 흉흉했다. 왕은 유행간(庾行簡)과 동성 간 사랑을 했고, 유행간은 총애를 믿고 국정을 농단했다. 또 김치양은 천추태후를 믿고 국정을 농단했다. 두 개의 비선 권력이 다투는 사이에 신하들은 좌불안석이었고, 누구도 백성들의 삶을 보살필 겨를이 없었다. 무능한 국왕은 김치양이 자신을 해칠 것이라고 의심해서 국경을 지키고 있던 강조에게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자신을 보호하도록 명했다. 그와 동시에 대량원군을 불러들였다. 아마 양위할 생각이 있었던 듯하다. 강조는 왕명을 받들어 개경에 왔으나 오히려 목종을 폐위하고 천추태후도 쫓아내고 김치양과 유행간을 죽이고 권력을 잡았다. 그리고 목종이 대량원군에게 양위하려 한 사실을 모른 채 따로 사람을 보내 대량원군을 모셔오게 했다. 우연히도 목종과 강조가 대량원군 옹립에 일치했던 것이다.

비선 권력들 다투다 현종에게 왕위

현종이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1018년(현종 9년) 창건한 현화사의 석등. 절은 북한 황해북도 장풍군에 있지만 석등은 남한으로 옮겨 현재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사진 이익주]

현종이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1018년(현종 9년) 창건한 현화사의 석등. 절은 북한 황해북도 장풍군에 있지만 석등은 남한으로 옮겨 현재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사진 이익주]

이렇게 해서 현종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왕위에 올랐다. 그랬기 때문에 현종이 왕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따로 만들어졌다. 우선, 어머니의 태몽이다. 헌정왕후가 꿈을 꾸었는데, 곡령에 올라가 오줌을 누었더니 나라 안에 흘러넘쳐 은빛 바다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실은 이 꿈은 헌정왕후의 창작이 아니었다. 더 먼 옛날 김유신의 동생 문희가 이 꿈을 꾸었고, 태조 왕건의 증조할머니도 언니에게서 이 꿈을 산 적이 있었다. 이 꿈 덕에 모두 귀인을 만났는데, 헌정왕후는 특별히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되어 한 나라를 갖게 될 것’이라는 해몽을 얻었다.

대량원군이 숭교사에 머물 때는 어떤 승려가 큰 별이 절 마당에 떨어져 용으로 변하고 또 사람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는데, 바로 대량원군이더라는 꿈을 꾸었다. 또 대량원군이 꿈에 닭 우는 소리와 다듬이 소리를 들었는데, 해몽은 이러했다. 닭 우는 소리 ‘꼬끼오’는 곧 ‘고귀위(高貴位)’이니 높고 귀한 자리라는 뜻이고, 다듬이 소리 ‘어근당(御近當)’은 임금 자리가 가깝다는 뜻이므로 모두 왕이 될 징조이다.

충남 천안의 홍경사 갈기비(碣記碑). 현종이 1026년(현종 17년) 아버지 왕욱의 유지를 받들어 창건하면서 그 사정을 기록해 세운 비석이다. 여행객의 안전을 돌보는 것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이라고 밝혀놓았다.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충남 천안의 홍경사 갈기비(碣記碑). 현종이 1026년(현종 17년) 아버지 왕욱의 유지를 받들어 창건하면서 그 사정을 기록해 세운 비석이다. 여행객의 안전을 돌보는 것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이라고 밝혀놓았다.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예언대로 현종이 왕이 되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예언의 적중은 십중팔구 결과를 아는 뒷사람이 만들었기 때문이니, 현종이 즉위한 뒤에 만들어진 이야기가 틀림없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만들고 즐긴 사람은 바로 고려의 일반 민중으로, 현종의 즉위와 관련된 설화는 민중의 지지와 기대를 반영한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현종은 허수아비 국왕일 수밖에 없었고, 모든 권력은 강조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런데 즉위 이듬해에 거란의 침략으로 전쟁이 일어나 강조가 전사하고 말았다. 권력자의 죽음은 현종에게 기회가 되었다. 전쟁 중 현종은 나주까지 몽진을 떠났다. 호위하는 군사가 수십 명에 불과했고, 도중에 도적을 걱정할 정도로 궁색한 행렬이었지만, 끝내 자리를 보존했고 거란과 협상을 벌이며 어느덧 항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011년 2차 전쟁이 끝난 뒤에는 언제 이런 준비를 했을까 싶을 정도로 국왕으로서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전쟁의 충격을 안정적으로 수습했으며, 공정한 논공행상을 통해 관료사회를 안정시켰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김훈·최질 등을 직접 처단하는 용기도 보여줬다. 절정은 지방관 파견이었다. 1018년, 고려 건국 100주년이 되는 이 해에 현종은 전국에 116명의 지방관을 파견했다. 983년 전국에 12명을 파견하기 시작한 이후 35년 만에 이룬 성과로, 고려의 중앙 집권을 사실상 완료한 것으로 평가되는 업적이다.

현화사 비문 왕욱 유배 사실 숨겨

국왕의 지위가 안정되면서 스스로 권위를 만들 줄도 알았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숭함으로써 출생의 약점을 지우려 했던 것이다. 사수현에 있던 아버지 묘를 개경으로 이장하고, 개경에 대자은현화사(大慈恩玄化寺, 줄여서 현화사)를 창건해 부모의 명복을 빌도록 했다. 역사에도 손을 댔다. 왕욱이 사수현에 내려간 것이 불륜에 따른 유배라는 사실을 숨기고, 거란의 침략으로 수도가 위험해지자 성종이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다는 내용으로 현화사 비석을 새겼다. 천안에 홍경사라는 절을 지으면서 여행객의 안전을 돌보는 것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훈이란 사실을 밝혀 놓았다.

18세에 억지로 왕이 된 이 젊은 국왕은 즉위하자마자 국가적 위기를 겪으며 성장했다. 1019년 거란에 최종 승리를 거두었을 때는 더이상 어리고 나약한 국왕이 아니었다. 왕실의 번영에도 족적을 남겼다. 세 아들 덕종·정종·문종이 차례로 왕위를 이음으로써 목종 이후 끊어질 뻔했던 왕실이 다시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족외혼을 통해 왕실과 운명을 같이 할 외척이 등장했고, 고려 귀족 사회의 출발점이 되었다. 여러모로 고려의 중흥으로, 이 중흥주의 탄생은 위기를 기회로 만듦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