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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강철로 공간을 조각한 예술가 리처드 세라 85세로 별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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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뉴욕욕현대미술관에서 리차드 세라의 "이퀄(Equal)"을 둘러보고 있는 관람객들. [AP=연합뉴스]

2020년 뉴욕욕현대미술관에서 리차드 세라의 "이퀄(Equal)"을 둘러보고 있는 관람객들. [AP=연합뉴스]

카타르 브루크 자연보호구역의 사막에 설치된 리처드 세라의 작품 '동서/서동'(2014)[AP=연합뉴스]

카타르 브루크 자연보호구역의 사막에 설치된 리처드 세라의 작품 '동서/서동'(2014)[AP=연합뉴스]

미국의 세계적인 조각가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가 26일(현지시간) 8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고 뉴욕타임스와 가디언 등 외신들이 27일 보도했다.

세라는 현대 미술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 중 한 명으로, 표면을 붉게 산화시킨 강철을 곡선 모양의 작품으로 세계 곳곳에 압도적 규모의 예술 작품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야외에 주로 공공미술로 선보인 그의 대형 조각은 단지 눈으로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간을 탐험하고 경험할 수 있게 설계돼 관람객이 주변 환경을 새롭게 보고 느끼고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라는 193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소에서 배관사(pipe-fitter)로 일했는데, 그는 "네 살 때 아버지를 따라가 거대한 유조선의 진수식을 본 기억이 평생 내 창작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됐다"고 말했다. 열다섯 살 때부터 방학 때면 제철소에서 일한 그는 1979년 제철소의 독일 노동자들에 대한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뒤 예일대에서 회화를 공부한 그는 예일대 여행 장학금에 이어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1960년대 중반 유럽에 체류했다. 그는 본래 화가를 꿈꿨으나 유럽에 사는 동안 파리에서 조각가 콘스탄틴 브란쿠시(1876~1957)의 작품에 매료되면서 그림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또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 본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그림을 보고 자신이 화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그는 고무와 네온관, 납 등의 재료로 추상 조각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1970년대에 들어서 거대한 철판을 재료로 공간을 구성하는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조각가로서 그의 주된 관심은 강철이라는 재료 본연의 힘을 최대한 살리고, 작품을 통해 공간을 형성하는 데 있었다. 그런 만큼 그는 얇고, 빛나는 금속판이나 기성품들을 작업에 쓰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대신 공업 재료인 강철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선호했다.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강철판을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한 그는 강철이 휘어져 있다면 볼트나 용접 없이 스스로 설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비난에 철거된 조각'기울어진 호' 

1989년 3월 뉴욕 맨해튼 연방광장에서 철거를 기다리고 있는 리처드 세라의 '기울어진 호'. [AP=연합뉴스]

1989년 3월 뉴욕 맨해튼 연방광장에서 철거를 기다리고 있는 리처드 세라의 '기울어진 호'. [AP=연합뉴스]

파리 그랑 팔레 미술관에서 자신의 다섯 개의 기념비적인 철판 앞에 선 리처드 세라. [Ap=연합뉴스]

파리 그랑 팔레 미술관에서 자신의 다섯 개의 기념비적인 철판 앞에 선 리처드 세라. [Ap=연합뉴스]

세라의 초기 공공 미술 작품은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게 미 정부의 의뢰를 받아 1981년 완성한 '기울어진 호'(Tilted Arc)다. 뉴욕 페더럴 광장에 설치된 이 작품은 가로 길이가 36m로 녹슨 철판이 기울어진 벽처럼 휜 상태로 광장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그러나 작품을 좋아하지 않은 사람들이 철거 청원을 냈고, 결국 공청회까지 열고 뜨거운 찬반 논쟁을 벌인 끝에 8년 후인 1989년 철거됐다.

이런 좌절에도 불구하고 이후 그의 작품은 미술계에서 더 인기를 얻어갔다. 1986년과 2007년에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두 번 회고전을 열었고, MoMA는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이퀄'(2015)에 영구적인 전시 공간을 내줬다.

2005년 스페인 구겐하임 미술관에 설치된 '시간의 문제'(The Matter of Time)도 그의 대표작이다. 4m가 넘는 높이의 거대한 철판이 유연하게 구부러져 미로 같은 형상이다.

그의 후기 대표작 중 하나는 2014년 카타르 브루크 자연보호구역에 1㎞에 걸쳐 세워진 14∼16m 높이의 네 강철기둥 '동-서/서-동'(East-West/West-East)다. 세라는 이 작품을 가리켜 "내가 한 것 중에 가장 만족스러운 작품"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라와 오랜 세월 함께 해온 가고시언 갤러리의 래리 가고시언 회장은 27일 홈페이지를 통해 "세라는 조각과 그림의 정의를 바꾸어 놓은 거인이었다"며 "그는 단순하면서도 숭고한 경험을 통해 우리가 보고 느끼는 방식을 변화시켰다"고 적었다. 이어 "그가 가장 신경 쓴 것은 우리의 경험 그 자체였다. 그는 우리에게 큰 공감의 유산을 남겼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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