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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혜리의 인생

"그러나 난 부끄럽다"…아프리카 먹여살려 칭송 받은 그의 후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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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지난 3월 4일 경기도 광교 한상기 박사 자택을 찾았다. [사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지난 3월 4일 경기도 광교 한상기 박사 자택을 찾았다. [사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우리는 아프리카를 모른다. 구호단체 모금 영상 속 기아·질병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어린이의 이미지가 아프리카의 전부라고 착각하며 겁을 먹는다. 전 세계 정보가 실시간으로 쏟아지고 해외여행이 일상화한 지금도 그러한데 하물며 1970년대엔 어땠을까. 가난과 재해, 전염병, 여기에 내전까지 덮친 저 먼 땅을 자기 삶의 터전으로 삼겠다는 생각을 하기란 그 누구라도 쉽지 않다. 그런데 그 시절 서울대 교수라는 안정된 삶, 그리고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원이라는 빛나는 커리어 대신 아무런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아프리카를 선택한 남자가 있었다. 나이지리아를 세계 8대 작물 카사바(타피오카 원재료) 세계 1위 생산국에 올려놓은 '나이지리아의 우장춘' 한상기 박사(91)다. 그는 왜 '한국의 우장춘'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우장춘'이 된 걸까. 1994년 은퇴 후 미국생활을 거쳐 2013년 귀국해 수원 광교에 자리 잡은 한 박사를 지난 4일 만나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 그날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2024년 대한민국과학기술유공자로 한 박사를 지정하고, 그의 집에 명패를 부착한 날이었다.

'슈퍼 카사바'로 기아 해결 기여
세계은행서도 공로 인정받아
현지 연구 자립 위해 700명 배출
핵심 후학, 내전 속 살해돼 먹먹

#명예 대신 도전, 운명이 된 선택

어떤 선택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서울대 농과대학 교수 시절인 30대 후반 영국과 나이지리아에서 각각 날아온 두 개의 초청장이 딱 그랬다. 하나는 케임브리지대 식물육종연구소(Plant Breeding Institute)라는 명예의 길, 다른 하나는 건물도 없이 이름뿐이던 나이지리아 국제열대농학연구소(IITA)라는 도전의 길이었다. 명예보다 도전을 택했다. 위험하다며 어릴 적 수영도 못 하게 했던 아버지, 가지 말라고 눈물로 호소하던 어머니. 두 분이 연이어 갑작스럽게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편안한 삶에 안주했을지도 모른다. 효도 한 번 못했다는 죄책감은 뒤로 한 채 중학생 큰딸은 제자에 맡기고 아내와 어린 삼 남매만 데리고 험난한 아프리카행에 나섰다. 어떻게 그런 담대한 결정을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 선택이 운명이 됐다는 것이다.

지난 1983년 나이지리아 이키레 읍(邑) 추장 대관식 후 아내와 함께. 아내는 떠났지만 지팡이는 아직 갖고 있다.[사진 한상기]

지난 1983년 나이지리아 이키레 읍(邑) 추장 대관식 후 아내와 함께. 아내는 떠났지만 지팡이는 아직 갖고 있다.[사진 한상기]

#첫 번째 도전, 미네소타 프로젝트

고향 충남 청양은 칠갑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샛강과 백마강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장마철이면 강물이 범람했고, 가난한 농부들은 농사를 망치고 보릿고개를 겨우 넘기며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대전중학교 국어 시간에 우장춘(1898~1959) 박사 얘기를 듣고 인생 경로를 정했다. 우 박사 같은 사람이 되어 우리나라의 배고픔을 해결하고 싶었다. 그런 열정으로 서울 농대에 갔고, 졸업 수학여행 때 만난 우 박사는 그런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줬다.
대학원 졸업 후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미 국제협력처가 1000만 달러를 지원한 '미네소타 프로젝트' 교환교수 기회를 얻은 거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제3 세계 43개국에서 진행한 국가 재건 프로젝트 중 하나였던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형편없던 한국 의학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실은 의학뿐 아니라 한국의 공학·농학 발전도 여기서 기인한 바가 크다. 1955~62년 서울대 교수진 226명이 미네소타 대학에 장단기 연수·유학을 갔는데, 여기에 선발됐다. 1960년부터 1년 동안 학비는 물론 숙식 등 모든 비용 걱정 없이 식물육종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서울대 최규남 총장(가운데)은 1954년 9월 5일 미네소타 대학교와 원조 협정을 체결했다. 한상기 박사는 이 프로젝트 수혜를 입어 유학을 다녀왔다. [사진 서울대]

서울대 최규남 총장(가운데)은 1954년 9월 5일 미네소타 대학교와 원조 협정을 체결했다. 한상기 박사는 이 프로젝트 수혜를 입어 유학을 다녀왔다. [사진 서울대]

서울대가 한국에선 최고의 대학이지만 그 시절 기초학문을 연구하기엔 초라했다. 선진 학문을 접해보니 배움의 욕구가 더 커졌다. 교수로 막 임용된 1965년 이 분야 거목 존 그래피우스 교수에게 청해 미시간주립대에서 박사를 했다. 가족은 시골 부모님 댁에 두고 홀로 유학을 갔다. 한국에 남은 가족은 비록 쥐꼬리만 해도 서울대에서 나오는 월급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는데, 무슨 영문인지 갑자기 외국 체류자에게 주던 봉급이 끊겼다. 그래피우스 박사는 이 소식을 듣고선 "가족에게 송금하라"며 매달 내 책상 위에 50달러 수표를 놓고 갔다. 다시 봉급이 나와 돈을 갚겠다고 하자 "100년 후에 갚으라"고 했고, 귀국 땐 비행기 표 살 돈까지 마련해줬다. 미국은, 그리고 그 나라 최고 석학은 이렇게 가난한 나라의 미래를 위해 유학생 하나를 정성껏 키워냈다.
박사를 마치고 돌아온 1967년 서울대 교수 월급으로 살 수 있는 곳은 방 한 칸짜리 사글세뿐이었다. 얼마 후 수원에 온 가족과 함께 들어간 수원 서울농대 교수 관사도 비만 오면 지붕에서 물이 새고 부엌에 물이 차는 열악한 곳이었다. 그렇다고 공부 열정이 꺾이진 않았다.

#두 번째 도전, 나이지리아의 식량난

유학 시절 논문 세 편이 영국 유명 학회지 '헤레더티(Heredity)'에 등재돼 영국과 나이지리아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다. 잠깐의 면접을 위해 김포공항을 떠나 홍콩, 태국 방콕, 인도 뭄바이, 예멘,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케냐 나이로비, 우간다 엔테베를 거쳐 4일 만에 나이지리아 라고스 공항에 도착했다. 당시 가장 빠른 항로였다. 육로로 100㎞를 더 달려 국제열대농학연구소(IITA)가 있는 항구도시 이바단에 도착했다. 10만 전사자와 100만 아사자를 낸 참혹한 비아프라 내전(1967~70) 직후라 엉망인 길 위로 파괴된 탱크와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희망조차 말라 죽은 대륙이었다. 이상하게 두려움 대신 아프리카 식량난을 해결하고픈 도전 욕구가 솟구쳤다. 당초 귀국편에 다른 면접장소 런던이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나이지리아였다.
당시 미국은 '굶주리면 공산화된다'는 우려에, 포드 재단과 록펠러 재단을 통해 식량난 해소를 목표로 전 세계 곳곳에 농업연구소를 세우던 중이었다. IITA는 통일벼로 유명한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IRRI)와 멕시코 국제밀옥수수연구소(CIMMYT)에 이은 세 번째 연구소였다. CIMMYT에서 일하던 노먼 볼로그(1914~2009) 박사가 내병다수성(耐病多收性·병충해에 강한 다수확) 밀을 만들어 멕시코·인도에 보급한 녹색혁명 공로로 1970년 노벨평화상을 받을 정도로 성과가 뛰어났다.

나이지리아 농민에게 개량 카사바 사용을 권하고 있는 한상기 박사. [사진 한상기]

나이지리아 농민에게 개량 카사바 사용을 권하고 있는 한상기 박사. [사진 한상기]

노벨상 같은 보상을 기대하고 이바단에 간 게 아니다. 북한 수교국 나이지리아는 당시 우리와 국교가 없어 위험했고, 연구해야 할 카사바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작물이었다. 참고할 자료도 없었다. 앞서 아프리카에 온 서구 연구진이 있었지만 이들은 고무 같은 돈 되는 작물에만 관심 있고 아프리카 기아를 해결할 카사바 같은 식량 작물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내가 내병다수성 슈퍼 카사바 개발에 성공(1976)한 지 10년쯤 뒤 일본 재벌 사사카와 료이치 일본선박진흥회 회장 부탁을 받고 가나에 온 노먼 볼로그조차 3~4년 만에 큰 성과 없이 아프리카를 떠났다. 명분은 기아 해결이라면서도, 서양 연구자들은 돈벌이에 급급하거나 아프리카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배곯아본 난 달랐다. 그들의 아픔을 이해했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었다. 수확량이 기존 카사바의 두 배가 넘는 신품종 카사바의 성공은, 그래서 내겐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연구소 반대를 무릅쓰고 카사바 줄기를 차에 싣고 시장에 가 나눠준 이유다.

#세 번째 도전, 한상기 프로젝트

'한상기 박사 연구로 카사바 병 문제가 해결되다.'
나이지리아 식량 혁명의 시작을 알린 나이지리아 데일리 타임스 1면 기사(1976)다. 치명적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로 생산량이 절반으로 줄었던 카사바를 개량해 나이지리아를 비롯해 아프리카 41개국 식량난 해소에 지금까지 도움을 주고 있다. 그 덕에 영국 기네스 과학공로상(1982), 영국생물학술원(Institute of Biology·영국 생물학회의 전신) 펠로 상(1984), 브라질리아 대학 주최 카사바 학회 공로상(2006) 등을 받았다. 케네디 정부 국방장관을 지낸 로버트 맥나마라 세계은행 총재(1968~81 재임)는 "한 박사의 슈퍼 카사바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땅에 빚을 덜 지게 해주는 신기술"이라 칭송했다.

지난 1973년 나이지리아 연구소를 찾은 맥나마라 세계은행 총재와 함께. [사진 한상기]

지난 1973년 나이지리아 연구소를 찾은 맥나마라 세계은행 총재와 함께. [사진 한상기]

영예로운 상들보다 더 기뻤던 건 1983년 연구소에서 50㎞ 떨어진 이키레 읍에서 '농민의 왕'(세레키아그베)이라는 칭호를 받고 요루바족 추장으로 추대된 일이다. 내 연구가 연구소 안에 머물지 않고 그들의 삶을 도왔다는 인정을 받아서다.

추앙받는다고 언제까지나 아프리카 왕으로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국이 나를 키운 것처럼, 나도 아프리카 사람을 키우고 싶었다. 1994년 IITA를 떠나 아이들이 있는 미국에 갈 때까지 23년 동안 위험한 출장을 마다치 않은 건 이런 이유도 있다. 아프리카 비행기는 퇴물이라 언제 추락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기상 정보 입수조차 안 되는 아프리카 공항은 토네이도가 몰려와도 알 길이 없었고, 활주로는 엉망이었다. IITA 직원 3명이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할 정도였다. 그래도 끊임없이 가서 지도했고, 연구소에 데려와 훈련시켰다. 그렇게 키운 게 700여명에 달한다.

 한상기 박사는 아프리카 현지에서 후학을 키우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가 연구소로 불러 가르친 숱한 제자들 목록. 국가별로 분류해 보관하고 있다. [사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한상기 박사는 아프리카 현지에서 후학을 키우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가 연구소로 불러 가르친 숱한 제자들 목록. 국가별로 분류해 보관하고 있다. [사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그중 잊히지 않는 인물이 자비 들여 만든 ‘한상기상’ 1, 2회 수상자인 르완다의 조지 은다마제 중앙농업시험장장과 조셉 물링다가보 지방농업시험장장, 그리고 시에라리온의 은잘라 농과대학 다니야 학장이다. 은다마제와 물링다가보는 1994년 6월 르완다 내전 당시 온 가족이 폭도들에게 몰살당했다. 시에라리온 내전(1991~2002) 때 값비싼 가재도구는 다 버려두고 슈퍼 카사바만 자동차에 싣고 피난 갈 정도로 그 나라 농업의 미래를 고민했던 다니야 역시 강도에 살해당했다. 르완다와 시에라리온은 이렇게 허무하게 아까운 인재를 잃었다.
하지만 가장 안타까운 건 한국 농업발전에는 아무런 기여를 못 했다는 점이다. 나이지리아 정착 초기부터 가족 전부 흡혈 파리(sand fly)에 물리고 말라리아에 걸리는 등 희생했고 이를 밑거름 삼아 나는 명예를 얻었다. 하지만 20년 넘도록 1년에 얼굴 한 번 본 게 고작인 큰딸의 결혼식엔 아예 못 갔고, 치안이 불안한 타지에서 남편 양말 기워가며 외롭게 가족 뒷바라지한 아내는 2009년 미국에서 치매 증상을 보인 끝에 2013년 귀국 후 2020년 세상을 떠났다. 땅이 꺼지고 세상이 무너지는 거 같았다. 미안한 마음뿐이다. 하지만 더한 후회는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거보다 한국을 돕지 못했다는 점이다. 비록 그땐 아프리카 식량난이 내 조국보다 더 극심해 여기에 인생을 걸었지만 부끄럽고 죄송하다. 내 조국 한국에, 그리고 사랑하는 내 가족에게.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