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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민정의 생활의 발견

통장이 없으니 콩장이라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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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민정 시인

김민정 시인

이즈음의 입맛은 누가 돋아줄까 싶어 편의점 아니고 제법 큰 마트엘 다 들렀는데 그 설렘이 무색할 정도로 흥을 잃어 가게를 나왔다. 마땅치 않은 살 거리에 사철 내내 꿈쩍 않고 자리를 지키는 조미김에 캔 참치 몇 개 들어 계산하는데 요맘때 다들 무얼 해 먹고 사나 식탁을 책임지는 이들의 난감함도 잘 모르면서 괜히 물가 운운 엄마 흉내로 나대고 섰는 나였다.

실은 둘러만 봤을까? 가지나 좀 볶을까 하다가 다시 내려놓고, 달래나 좀 무칠까 하다가 다시 내려놓고, 바지락이나 좀 끓일까 하다가 다시 내려놓고. 견출지에 찍힌 가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자연의 날 것이 조미로 간을 아는 접시가 될 때까지 소요될 과정 속의 어떤 ‘씀’을 생각하니 일순 달아나버리는 내 손이었다. 음식을 만들 때 손으로 이루는 솜씨에서 우러나오던 맛, 내겐 엄마만의 장치였던 그 손맛이 사실은 긍정이며 열정이며 책임이며 희생임을 느닷없이 깨닫고 만 데는 어디 먼 데 있나 싶게 더디 오는 듯한 봄기운에 우울함이 겹친 탓도 있으리라.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더는 감출 것도 못 되는 우울증의 나날, 사방팔방 안부를 물으면 누구 하나 시무룩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더욱 감춰야 할 것이 되어버린 무기력의 나날, 속사정은 따로 있으면서 괜히 봄을 핑계로 시비를 거나 싶어 검색창에 ‘유동근 샐러리맨’ 하고 자판을 쳐넣었다. “샐러리맨은 퇴근하고 싶다. 왜? 피곤하니까!” “샐러리맨은 쉬고 싶다. 왜? 피곤하니까!” 근 30년 전 이 광고를 자양강장제 마시듯 가끔 찾아보는 데는 나만 그러할까, 당신도 그러하듯 자는 동안에도 굴리지 않으면 안 될 생의 쳇바퀴가 너 나 할 것 없이 같은 모양새로 발밑에 있음을 재확인하고 싶어서였다.

털래털래 장바구니 들고 집에 도착하니 현관 앞 접어 세워놓은 손수레 위에 작은 쇼핑백이 하나 놓여 있었다. “통장이 없으니 콩장이라도” 검은 콩장이 든 반찬통 위에 붙은 메모지 속 손글씨. 그래, 밥맛은 이렇게도 손맛이었어!

김민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