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채병건의 시선

북한과 빨리 대화해야 한다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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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채병건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Chief에디터
채병건 Chief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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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이 다가오면서 정부가 남북 대화에 빨리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북미 정상회담을 했던 도널드 트럼프가 백악관에 입성해 북미 빅딜을 재시도할 경우 자칫 한국만 외톨이가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당위론적 차원에서 남북 대화는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북미가 만날 테니 우리도 빨리 만나야 한다는 식의 접근은 곤란하다. 만남은 항상 상대를 전제한다. 북한을 상대로 조급함이 앞서면 시작부터 패착이다.

북한, 받을 게 있어야만 움직여
미국과 직거래 시도 가능성도
한미 결속이 퍼주기·소외 차단

결론부터 말하면 북한을 그냥 만나는 경우는 없다. 북한은 뭔가 받을 게 있어야 움직인다. 외부와 차단해야 체제가 유지되는 북한 정권 입장에선 남한은 존재 자체로 위협이다. 비교 대상인 남한이 자유롭고 번영하는 나라가 될수록 북한 주민들에겐 ‘김정은 체제’를 벗어날 강력한 대체지가 된다. 북한이 그토록 막아도 남한 내 정착한 탈북민이 3만여 명이다. 반대로 북한은 남한 국민에게 대체지가 아니다. 남북 간엔 접촉이 미칠 효과가 전혀 다른 비대칭 구조가 굳어져 있다. 그러니 북한은 상시로 남한에서 흘러들어오는 ‘자본주의 날라리풍’을 막는 게 체제 수호를 위해 필수적이다. 북한 입장에선 체제 오염을 감수하고서라도 만나야 하는 이유, 즉 대가가 있어야 회담장으로 나온다.

문재인 정부에서 공공기관 책임자도 역임했던 대북 전문가의 얘기다. 평소 알고 지내던 중소기업인이 북한에 들어가 공장을 세워 사업을 하는 건 어떤지를 자문해왔다. 그의 조언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들어가지 말고, 공장 건물을 그대로 남겨주고 내려오려면 들어가라”였다고 한다. 남북 사업을 해본 이들은 다 알 것이다. 북한의 대남 사업에서 순수한 ‘우리 민족끼리’는 없다. 현장에서 만나는 사업 단위들은 항상 달러를 원한다는 게 이들의 전언이다. 그래서 북한을 만나려면 전략적으로 카드를 준비한 상태에서 만나야 한다.

그런데 무엇을 줄지는 무엇을 얻을지에 따라 달라진다. 당연히 한국이 얻을 목표는 비핵화이고 이를 전제로 한 남북의 공존공영이다. 하지만 한국은 북한이 당장 원하는 선물을 줄 수가 없다. 북한의 공개 요구는 ‘대북 적대시 정책’의 철회인데, 이는 대북제재의 해제를 뜻한다. 대북제재의 파괴력은 북한과 거래하는 기업·기관·개인을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금융결제망(스위프트)에서 퇴출하는 데 있는데, 이는 미 재무부의 소관 사항이다. 따라서 북한과 대화하려면 미국이 북한에 줄 생각이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미국이 한국에 속내를 드러낼 만큼 한미 간 신뢰가 유지되고 있어야 대북 견인력이 생긴다는 의미다.

둘째로 북한이 원하는 대화의 최종 상대는 남한이 아니다. 1948년 북한 정권의 수립 이후 지금까지 북한은 일관되게 대미 적대시 정책을 유지해왔다. 이른바 조국통일 전쟁도 미국의 개입으로 실패했고, 남한 괴뢰정권도 미국의 사주로 버티고 있다고 주장한다. 북한이 상대하려는 최종 보스는 미국이며, 그 목표는 미국이 한반도에서 물러나거나, 미국으로부터 체제보장을 받거나, 아니면 둘 다이다. 북한이 남북 대화에 적극 나서도 결국은 북미 직거래를 노린다는 건 문재인 정부 때 재확인됐다. 2019년 판문점 북미 정상 회동 당시 미국도, 북한도 한국 대통령이 함께 앉아 있는 삼자대면의 장면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북 대화는 두 가지 리스크가 상존한다. 첫째는 일관된 전략적 목표 없이 국내정치적으로 이용하면 돈만 쓴 채, 또는 전방의 감시 전력만 뒤로 물린 채 북한 핵미사일은 더 늘어나는 어리석은 퍼주기로 끝난다는 점. 둘째로는 이를 피하면서 어렵사리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냈는데 어느 순간 북미가 직거래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남북 관계를 안정적으로 지탱하는 두 축은 북미 관계와 한미 관계다. 북미 관계가 잘 돼야 남북 관계가 흔들리지 않고, 동시에 한미 관계가 끈끈해야 남북 관계가 뒤로 밀리지 않는다. 남북 관계라는 수레는 북미 바퀴와 한미 바퀴가 한 축으로 연결돼 같은 속도로 돌아야 앞으로 움직인다.

북한과 대화를 하려면 먼저 비핵화라는 분명한 목표에 부합하면서 북한을 유인해 낼 수 있는 카드를 강구하는 게 우선이다. 또 이 카드는 바이든 2기든, 트럼프 2기든 백악관과 함께 만드는 게 가장 강력하다. 마지막으로 이 카드엔 북미 관계 진전을 남북 관계 진전과 묶는 특약이 담겨 있어야 한다. 이런 전략적 준비 없이 조급하게 움직이는 순간 북한과 미국 모두에게 패를 읽힌다. 전략이 없는 조급함은 퍼주기나 소외로 끝나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