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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적 좋고 대응 미숙"…행동주의펀드 한국기업 공격 4년새 9배 증가

중앙일보

입력

행동주의 펀드의 한국 기업 공세가 거세지고 있다. 지난 4년 새 행동주의펀드의 공격을 받은 한국 기업 수가 10배 가까이 늘었다. 반도체‧배터리 등 수익 규모가 큰 기업들이 는 데다 한국 정부가 ‘주주가치 제고’ 압박에 나선 영향이다.

한국경제인협회가 법무법인 광장 김수연 연구위원에게 의뢰한 ‘주주행동주의 부상과 과제’에 따르면 지난해 23개국에서 951개 기업이 행동주의펀드의 공격을 받았다. 이는 2022년(875개), 2021년(773개)보다 각각 8.7%, 23% 늘어난 수치다.

20일 경기도 수원시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삼성전자 주주총회. 13명의 경영진이 단상에 올라 주주의 질문에 답을 하는 '주주와의 대화 시간'이 진행되고 있는 모습. 삼성전자

20일 경기도 수원시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삼성전자 주주총회. 13명의 경영진이 단상에 올라 주주의 질문에 답을 하는 '주주와의 대화 시간'이 진행되고 있는 모습. 삼성전자

한국은 조사대상인 23개국 중 세 번째로 많은 공세를 받았다. 2019년엔 8곳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77곳으로 9.6배 증가했다. 같은 기간 영국(56→35개), 독일(41→21개) 기업에 대한 공세는 약해졌고 일본(68→103개)은 1.5배 늘었다. 김수연 연구위원은 “공격적 행동주의로 수익을 내는 헤지펀드뿐 아니라 자산운용사, 기관투자자까지 한국 기업에 대한 경영 개입 강도가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런 추세엔 반도체‧전기차‧배터리 분야에서 눈에 띄는 실적을 기록한 한국 기업이 늘어난 영향이 크다. 유정주 한경협 기업제도팀장은 “조 단위로 수익을 내는 한국 기업이 늘면서 ‘한국에 먹을 게 있다’고 판단, 타깃으로 삼은 것”이라며 “유럽이 장기 침체로 마땅한 실적을 내지 못하면서 아시아 기업들로 눈을 돌리는 측면도 있다”라고 말했다.

최근 한국 정부가 ‘주주가치 제고’를 강조한 영향도 있다. 지난 정부에선 기업이 감사위원을 선임하거나 해임할 때 발행주식 총수의 3%를 초과하는 주식은 의결권을 강제로 제한하는 내용으로 상법을 개정했다. 윤석열 정부도 올해초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통해 기업들에 주주 환원을 강화하도록 압박하고 있다.

문제는 한국 기업이 아직 이런 공격에 대응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근 행동주의펀드는 여러 펀드가 연대해 한 기업을 공격하는 ‘울프팩’(Wolf Pack) 전략을 넘어서 ‘스와밍’(Swarming) 전략을 펴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여러 펀드가 기업 한 곳을 상대로 각각의 전략과 기대수익률에 맞춘 공격을 가하는 방식이다.

일본에선 행동주의펀드의 집중 공격에 못 이겨 아예 비상장으로 전환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비상장으로 전환한 일본 기업은 2015년 47개에서 2022년 135개로 증가했다. 김 연구위원은 “아시아 기업이 아직 행동주의 대응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도 글로벌 행동주의펀드의 공격 대상이 되는 빌미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유 팀장은 “주주가치 제고뿐 아니라 기업들이 행동주의펀드의 지나친 공격에 대응할 수 있는 방어 수단이 제도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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