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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만원 줄게, 사표 좀 대신 내주세요"…日 '퇴직대행' 난리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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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현예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김현예 도쿄 특파원

김현예 도쿄 특파원

“귀사에 재직 중인 00씨의 퇴직 절차를 대행하게 됐습니다. 1월 11일자로 귀사의 퇴직을 원하고 있으니 필요한 절차를 알려주시면 대행하겠습니다.”

지난 1월 일본 도쿄에 있는 IT컨설팅 회사인 이코퍼레이션닷제이피. 인사담당 임원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일년 남짓 회사를 다니던 직원이 ‘퇴사 대행 서비스’를 신청해 대신 전화했다는 것이었다. 퇴사 대행 서비스 회사가 건네온 건 사표. 거기엔 ‘본인과 절대로 직접 연락하지 말 것, 개인 물건은 우편으로 착불로 보내거나 버려달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이 회사 염종순 대표는 “업무용 프로그램 개발 경험이 전혀 없는 친구라 3개월 동안 연수 시키고 6개월간 사내 프로젝트에 참여시키면서 훈련 중이었는데 깜짝 놀랐다”고 토로했다. 염 대표는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본인과 직접 연락하지 말라고 하니 방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돈을 내고 사표 내는 사람들

지난 1일 도쿄에서 열린 취업박람회에 내년 봄 졸업 예정인 구직자들이 기업 설명회를 듣기 위해 줄을 서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1일 도쿄에서 열린 취업박람회에 내년 봄 졸업 예정인 구직자들이 기업 설명회를 듣기 위해 줄을 서있다. AFP=연합뉴스

일본에선 최근 몇 년 새 회사에 사표를 대신 내주는 퇴직 대행 회사들이 성업 중이다. 지난 2018년 일본 언론들을 통해 이색 서비스로 소개된 이후로 회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주된 고객은 젊은 층으로, 저출산 고령화로 일손 부족 상황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하기 어려운 사회 초년생들이 주로 이용한다.

실제로 퇴직 대행 회사들은 변호사나 노동조합, 민간 회사가 운영하는 경우로 구분되는데, 이용료는 1만엔(약 8만9000원)에서 2만9000엔(약 25만8000원)까지 다양하다. 회사들이 내세우고 있는 이용 후기 역시 20대가 주를 이룬다. “회사에서 인간관계가 힘들어 퇴사를 상담했지만 몇번이나 주위의 만류로 퇴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부터 “업무량이 많아 야근에 체력 한계가 왔는데 월급까지 적어 고민하다 퇴직 대행을 신청했다”까지 다양했다.
한 20대 여성은 “회사에 사람이 적은 데다 관계도 좋지 않아 사표 내기가 힘들었는데 퇴직 대행을 해보니 정신적으로 도움이 됐다”고 털어놨다. 퇴직 대행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자, 회사들은 메신저(SNS) 등을 통한 상담을 내세우며 ‘당일 퇴사’는 물론 다 쓰지 못한 휴가를 퇴사 전에 소진할 수 있도록 협상을 돕는다고 홍보하고 있다. 염종순 대표는  “회사에 퇴사 의사를 직접 말하길 어려워하는 일본 청년들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염종순 이코퍼레이션닷제이피 대표가 최근 '퇴직 대행' 서비스 회사를 이용한 신입직원의 퇴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현예 특파원

염종순 이코퍼레이션닷제이피 대표가 최근 '퇴직 대행' 서비스 회사를 이용한 신입직원의 퇴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현예 특파원

입도선매 이뤄지는 인력난

퇴직 대행이 성행하는 배경 중 하나는 일본의 인력난이다. 인력 부족으로 구인을 희망하는 기업이 많아 기존 직장을 그만두고 더 나은 처우의 회사로 옮기는 구직자가 늘면서 퇴사 대행 서비스의 이용자도 늘고 있다. 일본의 인력난을 실감할 수 있는 건 일부 기업의 도산이다. 도쿄상공리서치에 따르면 올 1~2월 사이 인력 부족으로 도산한 기업은 24곳에 달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14.2% 늘어났다. 지난해부터 본격화된 일본 기업들의 임금 인상도 원인으로 꼽힌다. 도쿄상공리서치는 “임금 인상으로 자금 사정이 악화한 기업을 중심으로 인력 부족 관련 도산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손 부족이 이어지면서 기업들은 신규 대학 졸업 예정자를 대상으로 입도선매에 나서고 있다. 신학기 시작은 4월이지만 개학 전인 3월부터 내년 봄 졸업 예정자를 대상으로 한 취업 설명회가 이어지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내년 대졸자의 ‘내정률’은 40.3%(3월 1일 기준)로 전년 대비 10% 높아졌다. 2017년에 4.6%에 그쳤던 것과 비교하면 온도차가 크다.

두 곳 이상 회사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는 사람은 내정자의 절반(48.2%)에 이를 정도로, 지난해(35.8%)보다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이른바 겹치기 합격자가 늘자, 기업들은 대졸 초임 올리기에 나서는 분위기다.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미즈호은행은 인력확보를 위해 초임자 급여를 5만5000엔(약 49만원) 올리기로 했다. JFE스틸(5만엔)을 비롯해 이토추상사(5만엔), 다이와증권그룹(1만엔) 등도 잇따라 초임을 인상하고 있다. 노무행정연구소에 따르면 2023년 4월 대졸자 기준 입사자들의 평균 임금은 전년 대비 3.1% 늘어난 22만5686엔(약 200만원), 고졸자는 3.7% 증가한 18만3388엔(약 163만원)으로 나타났다.

지난 7일 지하철 역을 빠져나가고 있는 시민들. 일본 후생노동성은 이날 1인당 평균 명목 임금인 현금급여 총액이 전년 대비 2.0% 늘어난 28만2207엔이라고 발표했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실질 임금은 전년 동월 대비 0.6%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EPA=연합뉴스

지난 7일 지하철 역을 빠져나가고 있는 시민들. 일본 후생노동성은 이날 1인당 평균 명목 임금인 현금급여 총액이 전년 대비 2.0% 늘어난 28만2207엔이라고 발표했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실질 임금은 전년 동월 대비 0.6%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EPA=연합뉴스

대졸자 30% 3년 이내에 이직 

요미우리는 “저출산으로 대졸 예정자 감소에 더해 기업이 고민에 빠지게 하는 것이 젊은 직원들의 이직”이라며 달라진 분위기를 전했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지난 2020년 3월 졸업자 기준, 32.3%가 3년 이내에 이직을 선택하는 등 신입사원들의 이직률이 높아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김명중 닛세이기초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최근 들어 비자발적인 이직자보다 자발적 이직자가 증가하면서 퇴직대행에 대한 수요를 높이고 있다”고 짚었다. 기업 도산처럼 비자발적인 이직보다, 개인의 사정을 이유로 한 자발적인 이직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 총무성 통계국에 따르면 지난 2022년 1월 실업자는 185만명, 이 중 자발적인 이직자는 69만명이었다. 하지만 올 1월 기준 실업자 163만명 가운데 자발적 이직자가 71만명에 달한다는 설명이다. 김 수석 연구원은 “전체 실업자는 줄고, 자발적 이직자가 증가한 것”이라며 “본인 사정을 구체적으로 밝히기 싫거나 대인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경우 퇴직 대행사 이용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