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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향은의 트렌드터치

AI 시대의 ‘디지털 어포던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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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향은 LG전자 CX담당 상무

이향은 LG전자 CX담당 상무

지난 도쿄 출장길은 유독 새로웠다. 공항에서부터 마주한 화장실과 이후 방문한 도쿄 시내 곳곳의 화장실에서 발견한 동일한 패턴 때문이었다. 변기 옆에는 물 내림 버튼, 물 흐르는 소리를 내주는 음향 매너 버튼, 응급호출 버튼이 색깔로 구분돼 큼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으로 확연하게 구분되는 버튼 세트는 어느 화장실에도 있었다. 확실히 인지할 수 있었고, 쉽게 누를 수 있었다. 손가락에 힘이 없는 사람들도 손바닥이나 팔꿈치로 누르기에 충분할 정도의 사이즈에 시인성도 높았다.

기술보다 사용자와 교감 중요
포용력 있는 AI 사회 위해서는
기술 사각지대 사람도 배려한
유니버설 디자인을 고민해야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얼핏 스마트홈이라는 미명 하에 모든 요소를 감추고 온통 디스플레이로 마감하는 오늘날의 인테리어 트렌드에 역행하는듯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건축이나 사이니지(signage) 디자인 능력이 부족해서 물리적 버튼들을 전면에 도드라지게 배치했을까?

개항 이후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메이지 시기 초기(1868~)부터 일본은 유럽의 문화와 앞선 과학기술을 동경하며 도시 곳곳에 근대 건축을 빠르게 도입한 나라다. 개혁적이면서도 수준 높은 미학을 자랑하는 국가라는 이야기다. 그런 일본이 생존권과 맞닿은 가장 사적인 공간에 사용자가 인지적 오류를 범할 확률을 줄이고 가장 적은 노력으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최우선으로 갖추어 놓았다는 사실에서 문화적 성숙도와 자신감마저 느낄 수 있었다. 진정한 의미의 ‘스마트’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사용자와의 교감 정도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새삼 환기하기에 충분했다.

1990년대 전반에 이미 고령사회(노인 인구 비율 14% 초과)로 진입한 일본은 일찌감치 ‘유니버설 디자인’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은 모든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제품·서비스 및 환경을 설계하는 원칙과 방법론이다. 즉 장애가 있거나, 나이가 아주 많거나, 임산부와 같은 특수한 조건의 사람 누구나 똑같이 사용하기 쉽게 설계된 디자인을 말한다. 예를 들어 경사로나 슬라이딩 도어의 기능을 갖춘 건물 출입구는 휠체어를 탄 사람들뿐 아니라 높은 계단을 부담스러워하는 노인이나 어린아이 등 다양한 사람들에게 편리한 출입구가 된다.

모든 사람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제품과 환경을 만들기 위한 원칙을 강조하는 유니버설 디자인은 실제로 건축분야에서 가장 먼저 태동했다. 어린 시절 척수성 소아마비를 겪으며 휠체어를 이용해야 했던 미국의 건축가 론 메이스(Ron Mace)는 1966년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디자인학과를 졸업한 후 본격적으로 건축 설계를 시작했다. 1973년 미국에서 최초로 건물의 접근성 관련 법률의 초안을 만들기도 했다. 메이스는 건축 환경뿐만 아니라 모든 제품과 서비스에 이 접근 방식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유니버설 디자인’이라는 용어를 창시했다. 이후 유니버설 디자인은 특정 학문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간의 활동과 보건, 건강, 사회 참여를 증진함으로써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더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디자인 과정이라는 것을 널리 알렸다.

바야흐로 인공지능(AI) 시대를 접한 우리 사회에서 접근성을 고려한 기술 및 서비스 개발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AI 기술은 사용자와의 상호 작용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음성 인식, 자연어 처리, 이미지 분석 등의 기술은 사용자들이 디지털 시스템과 더욱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동시에 사용자들이 시스템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사용자들이 각종 디지털 및 AI 기술을 쉽게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 즉 디지털 어포던스(Digital affordance) 문제가 자연스레 대두한다.

‘어포던스’라는 단어는 사물이나 환경이 사용자에게 어떤 행동이나 상호 작용을 유도하거나 의도적으로 제공하는 능력을 뜻한다. 이 용어는 초기에는 주로 인간 지각과 환경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심리학적인 이론에서 사용되었는데, 점차 사용자가 사물이나 환경의 특성을 바탕으로 가능한 행동을 예측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디자인 원칙으로 확장되었다.

인공지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사용자들이 시스템과 자연스럽게 상호 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디지털 어포던스가 필수적이다. AI 기술의 사각지대에 놓인 다양한 사람들까지 고려하여 모두가 참여하고 포용되는 진짜 스마트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디지털 어포던스를 위한 지속적 노력이 필요하다.

이향은 LG전자 CX담당 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