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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청 복사기가 부족해서…" 대장동 첫 공판도 이래서 밀렸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증거기록 열람·등사를 하는 데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나요?

지난 19일 오후 서울남부지법 형사합의15부 양환승 부장판사가 물었다. 고객을 속여 1조4000억원대 코인을 편취한 혐의(사기)를 받는 가상자산 예치업체 하루 인베스트 경영진의 첫 형사 재판에서다. 피고인 측 변호사는 “검찰청 복사기가 한정돼서 통상 2~3주는 소요된다”며 “이 사건뿐 아니라 다른 사건도 마찬가지”라고 답했다. 순간 방청객 곳곳에서 한숨과 헛웃음이 나왔다. 열람·등사 문제를 놓고 재판부와 변호인 간 실랑이가 오간 끝에 기일은 결국 예정보다 일주일 미뤄졌다. 사기 피해자 강모씨는 재판이 끝난 뒤 “하루라도 빨리 재판이 진행됐으면 좋겠는데 복사기가 부족해 기일이 밀릴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서울중앙·남부지검 등 형사 사건이 많은 검찰청에서는 재판 기록 열람·등사 수요를 복사기가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뉴스1

서울중앙·남부지검 등 형사 사건이 많은 검찰청에서는 재판 기록 열람·등사 수요를 복사기가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뉴스1

검사가 제출한 증거기록 등을 확인하는 열람·등사는 형사 재판에서 피고인 방어권 보장을 위한 핵심 절차다. 하지만 열람·등사를 위한 복사기가 충분치 않아 재판이 공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검찰이 국회에 제출한 2023년도 예산안에 따르면, 대검찰청은 29개 검찰청 민원실에 총 60대의 고속 스캔·복사기를 5년간 임대 형태로 배치했다. 전국 모든 형사 재판의 관련 기록을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사건당 열람·등사 기록은 많으면 수십만 쪽에 이른다. 한 검사 출신 변호사는 “서울중앙·남부지검 등은 사건 수가 많고 사건별 기록 양도 많아 복사기 수가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순번 밀려 신청 한 달 만에”…골무 끼고 한 장씩 복사 

20일 오후 서울남부지검 민원실에선 변호사 사무실 직원 8명이 손가락에 골무를 끼고 복사와 마스킹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 옆에는 약 60㎝ 높이의 서류 뭉치가 있었다. 이날 두 시간 넘게 등사를 했다는 직원 김모씨는 “순번이 밀려 신청한 지 한 달 만에 왔다”며 “수천 쪽 이상의 기록은 하루 안에 작업을 마치지 못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열람·등사는 신청제로 이뤄진다. 담당 검사의 허가를 받은 뒤 순번이 돼야 검찰청 민원실 복사기 앞에 설 수 있다. 분실 방지를 위해 자동 복사도 허용되지 않아서 기록을 한 장 한 장 직접 복사해야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름·주소 등 개인정보를 가리는 마스킹 작업을 하고 검찰 직원의 최종 검수까지 거쳐야 기록을 받을 수 있다.

21일 오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민원실에 비치된 열람등사 신청 관련 안내문. 검사가 제출한 증거기록 등을 확인하는 열람·등사는 형사 재판에서 피고인 방어권 보장을 위한 핵심 절차다. 박종서 기자

21일 오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민원실에 비치된 열람등사 신청 관련 안내문. 검사가 제출한 증거기록 등을 확인하는 열람·등사는 형사 재판에서 피고인 방어권 보장을 위한 핵심 절차다. 박종서 기자

검찰은 민감한 정보를 다루는 만큼 시간이 걸리더라도 엄격한 절차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반면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열람·등사가 늦어 두 달 가까이 재판이 미뤄진 사건도 있다”며 “어차피 복사하고 다시 PDF 파일로 변환하는데 21세기에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오는 10월 형사 전자소송 도입 뒤 해소 전망

실제 수사 기록이 방대한 주요 사건은 수개월씩은 예사로 지체된다. 지난해 5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대장동 의혹 공판준비기일에서 이 대표 측은 “수사기록이 20만쪽에 달한다”며 “복사에 수개월이 걸리고, 기록 검토에도 1년 정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공전을 거듭한 대장동 사건 첫 공판은 지난해 10월에서야 겨우 열렸다.

열람·등사에 따른 재판 지연은 형사 전자소송이 시행되는 올해 10월이나 돼서야 차차 해소될 전망이다. 국회는 지난 2021년 9월 형사사법 절차에서 서류 대신 전자문서를 사용하는 내용을 핵심으로 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민사·행정 소송의 경우 이미 2011년부터 전자소송제도가 도입된 상태다. 다만 이창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형사 전자소송이 도입되더라도 수사 및 증거기록에 관한 검찰의 권한이 제한되진 않는다”며 “열람·등사 범위 등을 놓고 벌이는 검찰과 변호인 간 실랑이는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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