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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의 화두 '난 누구인가'…신작 '동조자'가 결정판 될 듯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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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2호 22면

오동진의 전지적 시네마 시점

4월 쿠팡플레이 공개 예정인 박찬욱의 드라마 ‘동조자’ [사진 각 제작사]

4월 쿠팡플레이 공개 예정인 박찬욱의 드라마 ‘동조자’ [사진 각 제작사]

박찬욱의 신작이자 7부작 드라마인 ‘동조자’가 국내 OTT인 쿠팡 플레이에서 4월 공개될 예정이다. 이것은 다소 부득이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선택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는 미국 등 다른 나라에서는 워너 미디어 그룹 중 하나인 HBO맥스에서 공개되는데, 이렇게 되면 국내에서는 선택지가 좁아지기 때문이다. 넷플릭스는 글로벌 OTT라 여기에 올리면 전 세계 스트리밍 서비스 과정에서 HBO와 충돌하게 된다. 국내 OTT 중 TVING과 웨이브 등을 선택하기에는 그 회사들의 현재 사정이 좋지 않다. 결국 쿠팡이라는 배송 쇼핑몰 업체의 자본력이 박찬욱으로 하여금 쿠팡플레이를 선택하게 한 셈이지만, 그와 그의 작품에게 그다지 잘 맞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건 그의 또 다른 걸작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의 국내 최초 공개가 채널A였던 것만큼 어울리지 않는 일일 수 있다.

영화 ‘동조자’의 동명 원작 소설은 순전히 박찬욱 때문에 국내에 많이 알려지게 됐다. 그가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 공개된 후에야 비로소 국내에도 번역본이 있다는 것이 알려졌을 정도다. 소설 『동조자』는 베트남계 미국인 작가 비엣 타인 응우엔의 첫 소설이지만, 데뷔와 동시에 퓰리처 상을 탔을 정도로 그 내용의 심도를 인정받은 작품이다. 전 세계에서 박찬욱 만큼 소설의 독해 수준이 최고인 감독도 없다. 그가 특정 소설을 영화로 만들어 내는 과정을 보고 있으면 작품의 ‘인수 분해’ 실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영화 만든다는 소식에 원작소설 알려져

4월 쿠팡플레이 공개 예정인 박찬욱의 드라마 ‘동조자’ [사진 각 제작사]

4월 쿠팡플레이 공개 예정인 박찬욱의 드라마 ‘동조자’ [사진 각 제작사]

예컨대 전작 드라마인 ‘리틀 드러머 걸’은 존 르 카레가 쓴 원작을 영화로 만든 것이었다. 카레의 소설 대부분은 난독증을 일으킬 만큼 독파하기가 쉽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고, 그중 ‘리틀 드러머 걸’은 거의 최고 수준이라 평가된다. 존 르 카레는 조직 내부의 이중 스파이에 대한 이야기를 즐겨 그린다.(『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대표적이다.) 카레의 소설이 쉽지 않은 것은 그 이중, 다중의 복잡 다단한 심리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동은 이해하고 따라 가기가 비교적 수월한 편이다. 그보다 문제는 그 심리다. 사람의 한 길 마음 속은 완전히 분석해 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리틀 드러머 걸’은 이스라엘 정보국에 ‘캐스팅된’ 배우 출신의 여인 찰리(플로렌스 퓨)가 아랍 테러리스트 조직에 침투하지만, 양 조직간 작전 모두에서 주어진 역할을 해 내며 자기 분열을 심하게 겪게 되는 이야기이다. 나는 누구의 스파이인가. 나는 이쪽 사람인가 저쪽 사람인가. 과연 나는 누구란 말인가.

이 ‘나는 누구인가’야 말로 박찬욱이 가장 좋아하는 심층의 주제의식이다. 박찬욱은 검은 색도 흰 색도 좋아하지 않고 빨간 색도 파란 색도 노란 색도, 그 어떤 원색도 좋아 하지 않는다. 박찬욱이 선호하는 심리의 색깔은 회색이다. 이쪽이었던 사람이 저쪽과 어울려서 정보를 캐 오라는 명령을 받는다. 근데 그러기 위해서는 완전히 저 쪽 사람이 되라,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하도록 훈련을 받는다. 그는 완전히 저쪽 사람처럼 굴 수 있을 만큼 ‘꼴’이 만들어지는데 그러다 결국 진짜로 저쪽 사람이 되고 만다.

박찬욱의 전작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사진 각 제작사]

박찬욱의 전작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사진 각 제작사]

안 그런 것 같지만 박찬욱이 영국 작가 새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 스미스』를 영화로 만든 ‘아가씨’도 정체성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 간 자아 분열의 이야기이자 그 확장판에 해당하는 영화이다. 원래 전문 소매치기인 숙희(김태리)는 사기꾼인 백작(하정우)과 짜고 귀족 가문의 딸 히데코(김민희)를 꾀어 내 사기 결혼으로 그녀의 재산을 가로 챌 계획을 짠다. 처음에 숙희는 백작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숙희는 점점 히데코에게 동화되기 시작한다. 급기야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이제 숙희는 역으로 백작의 음모와 계획을 히데코에게 알려 주기 시작한다. 숙희와 히데코는 결국 판을 새롭게 짜기로 한다. 영화 ‘아가씨’ 역시 결국 이 ‘나는 누구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박찬욱의 전작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사진 각 제작사]

박찬욱의 전작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사진 각 제작사]

박찬욱 최고의 치명적 멜로영화 ‘헤어질 결심’ 역시 궁극적으로는 자아 분열의 내용이다. 주인공 형사 해준(박해일)은 살인범인 서래(탕웨이)를 수사하고 체포해야 한다. 하지만 그녀가 왜 남편 기도수(유승목)를 죽여야 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는 여자가 자신을 의도적으로 속였지만 그 거짓말 안에 들어 있는 사랑의 진실을 알아 차린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며 화를 내지만 여자가 ‘자신이 그렇게 나쁩니까(당신을 사랑하는 게 잘못입니까)’라는 반문에 답을 하지 못한다. 해준의 자아는 이미 붕괴된 상태이다. 진작에 그는 “나는 (당신때문에) 붕괴됐어요”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휴대폰을 포함해 모든 증거를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여자에게 ‘동조’한다. 영화 ‘헤어질 결심’은 사회적 윤리와 개인의 사랑 사이에서 충돌하는 자아의 얘기를 그린다. 박찬욱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여기서도 내내 제기되고 있는 셈이다.

신작 드라마 ‘동조자’ 야 말로, 짐작하건대, 바로 그런 주제에 있어 결정판과 같은 작품이 될 것이다. 박찬욱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와 가장 잘 만들 수 있는 이야기 중 하나를 선택한다. 그 둘이 맞아 떨어질 때도 있지만 그 둘이 별개일 때도 있다. 박찬욱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스파이 스릴러다. 그리고 그는 이중 심리, 자아가 분열된 존재에 대한 묘사에 일가견이 있다. ‘동조자’는 그 두 가지 모두를 구현하는데 있어 최적의 작품이다.

국정원서 일했다면 유능한 스파이 됐을 것

영화 ‘아가씨’ 촬영 현장. 왼쪽부터 박찬욱 감독과 배우 하정우, 김민희. [사진 각 제작사]

영화 ‘아가씨’ 촬영 현장. 왼쪽부터 박찬욱 감독과 배우 하정우, 김민희. [사진 각 제작사]

북베트남 공산당의 일원인 주인공이 당의 명령을 받고 남베트남 군부 실세인 한 장군의 비서이자 대위로 침투한다. 그는 (의심을 사지 않을 정도로) 장군을 충심으로 모시면서 모든 정보를 빼 내 북베트남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하지만 월남 패전 후에도 장군을 따라 미국으로 같이 망명하라는, 당을 위해 계속 스파이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고 혼란에 빠진다. 주인공은 이미 엄청난 분열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다. 자신이 당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은 오직 당의 간부, 극소수의 인사만이 아는 이야기이다. 만약 그의 비밀인가 서류를 누가 파기했다면 그는 영락없이 패망한 월남의 반공 부르주아 군인으로 전락할 뿐이다. 자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어느 쪽에 서야 하는 것인가. 이미 나는 ‘이쪽’이 아닌가. 하긴 아직 ‘저쪽’이기도 하다. 그는 결국 미군에 의해 간첩혐의로 체포돼 수사를 받게 되고 자신의 정체에 대해 진술하기 시작한다.

박찬욱의 영화 만들기는 결국 그가 그리는 이중 스파이 게임과 같은 것이다. 배우에게 특정한 캐릭터를 부여하면서 박찬욱은 배우에게 그 인물과 동화될 것을 요구한다. 배우는 극중 인물이 되기 위해 그 인물처럼 행동하고, 그 인물의 외모와 스타일을 따라 한다. 박찬욱의 배우들은 그래서 종종 자기가 배우인지 실제 인물인지를 헷갈려 하게 된다. 박찬욱이 만약 국정원이나 CIA, 모사드나 MI6 등 첩보 조직에서 일했으면 매우 유능한 간부급 스파이가 됐을 것이다. 박찬욱의 현재 외모는 약간 존 르 카레의 페르소나 캐릭터인 스마일리를 닮았다. 스마일리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서 세기의 명배우 게리 올드만이 역할을 맡았다. 인간적이지만 때론 야멸찰 만큼 냉정한 캐릭터이다. 스파이는 그래야 한다. 어쩌면 영화감독도 그래야 할 것이다.

박찬욱은 서강대 철학과 출신이고 82학번으로 전형적인 586이다. 그런데 서강대 학풍이 격렬했던 학생운동과는 다소 거리두기를 했던 덕인지, 혹은 탓인지, 자신의 이념적 성향을 한 곳에 가두지 않는, 코스모폴리탄의 성향을 일찌감치 갖게 됐다. 그가 글로벌 작가가 된 것도 칼 포퍼 류의 열린 사회에 대한 생래적 믿음과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다. 늘 라이카 카메라를 넣고 다닐 만큼 사진에 열광적인데, 실제로 사진작품으로 개인전을 몇 번 열기도 했다. 미국의 데이빗 린치 감독처럼 매우 독자적인 정신세계를 구축했지만 때론 현란할 정도로 탐미적이고 종종 무정부주의에 가까울 만큼 자기 파괴적이기도 하다.

지난 30년간 박찬욱은 ‘복수는 나의 것’ ‘올드 보이’ ‘친절한 금자씨’ 등 복수 3부작을 비롯해 만드는 작품마다 화제를 모았으며, ‘헤어질 결심’처럼 만드는 작품마다 자신의 새로운 걸작 기준을 만들어 내곤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아직 자신의 최고 걸작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는 것이며 여전히 현재 진행형의 작가라는 점이다. 그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그의 종착지는 어디인 것인가. 박찬욱 당신은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11@naver.com 연합뉴스·YTN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이후 영화주간지 ‘FILM2.0’ 창간, ‘씨네버스’ 편집장을 역임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컨텐츠필름마켓 위원장을 지냈다. 『사랑은 혁명처럼 혁명은 영화처럼』 등 평론서와  에세이 『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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