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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4>

남양인은 어떻게 진화했을까…'마다가스카르 해적'이 준 힌트

중앙일보

입력

김기협 역사학자
김기협 역사학자

김기협 역사학자

3회에 걸쳐 〈남양사〉에 담고 싶은 내용의 기본 방향을 제시했다. 서론 격이다. 이제 본론을 펼쳐나갈 길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남양사〉서술이 하나의 ‘통사(通史)’를 지향하는가? 아직 깔끔한 통사를 바랄 때가 아니다. 내 준비가 모자랄 뿐 아니라 학계의 연구 총량 자체가 부족하다.
〈통상시대의 동남아시아〉(1988, 1993)로 획기적 업적을 낸 앤서니 리드의 〈갈림길의 역사-동남아시아 A History of Southeast Asia: Critical Crossroad〉(2015)도 통사를 표방하지 않았다. 20개 챕터를 느슨한 시간순으로 나열한 데다 머리말도 아주 짧고 맺음말은 없다. (1939년생인 리드에게는 이 책이 평생 연구의 집대성일 텐데도.)

앤서니 리드, 〈갈림길의 역사-동남아시아〉. 폭넓은 연구를 발판으로 ‘통사’에 접근한 서술이다.

앤서니 리드, 〈갈림길의 역사-동남아시아〉. 폭넓은 연구를 발판으로 ‘통사’에 접근한 서술이다.

내 〈남양사〉가 리드의 책보다 치밀한 구성을 바라볼 길은 없다. 그나 나나 길 없는 들판을 가로지르는 하이커다. 각자의 체력과 장비, 그리고 취향에 맞춰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아 나갈 뿐이다.

시대구분을 미뤄놓고

리드는 엄밀한 의미의 ‘시대구분(periodization)’을 시도하지 않았다. 몇 개의 ‘시기’를 설정했을 뿐이다. 동남아시아 역사의 정리라는 과제를 놓고 지금 시점에서 합당한 태도로 보인다. 시대구분은 역사서술의 출발점 아닌 종점이다. 연구가 어느 정도 쌓인 뒤에야 시도할 수 있는 일이다.

시대구분은 흔히 생산양식, 정치조직 등에 나타나는 일정한 발전단계를 (고대-중세-근대) 전제로 행해진다. 그런데 과연 남양사에서도 그런 발전단계를 확인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남양사의 흐름은 우리가 익숙한 동양사나 서양사와 결이 크게 다를 수도 있을 것 같다. 침대 길이에 맞춰 손님의 키를 줄이거나 늘리는 프로크루스테스의 횡포를 조심해야겠다.

나 역시 일단 ‘시대구분’ 아닌 ‘시기 설정’으로 시작한다. 남양사 흐름의 뚜렷한 굴곡을 기준으로 몇 개 시기를 잠정적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교섭사 방면을 주로 공부해 온 내게는 남양과 외부 사이의 관계 양상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 변화를 기준으로 아래와 같은 몇 개 시기를 설정해 본다.

1. 고립기(–1500~800): 남양어(남양어족 언어들)가 동남아를 중심으로 인도양과 태평양 일대에 확산된 시기. 남양인(남양어를 쓰는 집단들)의 영역을 찾아오는 외지인이 극히 적었다.

2. 침투기(800~1400): 남양 특산물의 외부 시장이 자라나는 데 따라 그를 찾아 진입하는 외지인이 늘어나지만 남양 사회의 구조를 바꿀 정도의 조직적 활동에는 이르지 않은 단계.

3. 교착기(1400~1700): 주요 교통로를 따라 곳곳에 외지인의 거점이 만들어지는 시기. 앤서니 리드가 말하는 ‘통상시대’에 해당한다.

4. 식민기(1700~1800): 외지인이 남양의 토지를 점령하고 플랜테이션을 확장한 시기. 남양 사회의 전면적 변화가 경제 방면으로부터 일어난다.

5. 정복기(1800-1950): 남양 전역이 유럽 열강의 식민지배를 받은 시기. 중국인 이주민이 크게 늘어 남양사회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자리 잡는다.

혈연 개념이 아닌 ‘남양인’

남양인은 혈통에 근거한 ‘종족’이 아니다. 남양어를 쓰고 상당 범위의 생활양식과 생산양식을 공유하는 집단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 집단들이 유전적 특성을 얼마간 공유하기도 하지만 그 공유는 명확한 경계가 없는 막연한 경향성 정도다.

남양어 팽창기(기원전 1500-1000년경)에 남양어 집단들이 남양 전역으로 퍼져나간 힘은 각 지역 원주민보다 우월한 생산력과 전투력에 있었다. 그 힘 앞에서 대다수 원주민 집단은 멸종해 사라지기보다는 이주민 사회에 동화해 편입되었다.

‘네그리토(Negrito)’는 남양 곳곳의 오지에서 동화하지 않고 원래 모습을 지킨 소규모 원주민 집단들의 통칭이다. 검고 작다는 뜻의 그 이름은 이들의 신체적 특징을 묘사하는 것이다. 대륙부와 해양부의 여러 곳에 산재해 있어서 남양인 진출 전에 널리 퍼져 있던 원주민 모습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리핀 루손섬 오지의 아에타(Aeta)족도 그런 집단의 하나인데 흥미로운 현상을 보여준다. 극심한 태풍 피해로 생존 조건이 위태로울 때 평소에 아에타족을 멀리하던 다른 인근 주민들이 아에타족과 결혼을 많이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극한상황에서 생존의 노하우를 잘 갖춘 아에타족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다. (앤서니 리드, 〈갈림길 위의 동남아 역사〉, 8쪽)

1590년대에 그려진 아에타족의 모습. 검은 피부, 작은 키, 납작코, 곱슬머리 등 많은 신체적 특성을 여러 지역 네그리토가 공유하지만 혈연관계는 유전자 연구로 확인되지 않는다. 남양어 팽창기 이전의 수천 년간 같은 기후조건 속에 살면서 그 특성들이 빚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590년대에 그려진 아에타족의 모습. 검은 피부, 작은 키, 납작코, 곱슬머리 등 많은 신체적 특성을 여러 지역 네그리토가 공유하지만 혈연관계는 유전자 연구로 확인되지 않는다. 남양어 팽창기 이전의 수천 년간 같은 기후조건 속에 살면서 그 특성들이 빚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상 수없이 벌어진 상황의 연장선 위에서 이해할 일이다. 남양인의 확산 앞에서 독특한 생존 기술을 가진 집단들이 여기저기 자기네 틈새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심각한 재해가 닥치면 따로따로 살아가던 이주민과 원주민이 위기 극복을 위해 힘과 지혜를 합치는 일이 거듭되었다. 우월한 기술을 가진 이주민에게 원주민이 의지하는 상황이 쉽게 떠오르지만, 아에타족의 경우처럼 반대 상황도 있었던 것이다.

남양어 확산 과정을 통해 이주민이 원주민에게 영향을 끼치는 측면이 더 컸겠지만 반대 방향의 영향도 있었다. 특정한 장소에서의 생산-생활에는 원주민이 우월한 지식과 기술을 가진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원주민과 이주민이 통합된 남양인이 형성되었고, 각지의 남양인은 지역마다 다른 자기만의 특성을 갖게 되었다.

마다가스카르의 “해적 계몽시대”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원주민 집단과 이주민 집단 사이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현장 밖의 사람들은 단순한 구조를 생각하려 들기 쉽다. 원주민의 힘이 강해 이주민을 막아내든가, 아니면 이주민이 우월한 기술력으로 원주민을 몰아내거나 동화시킨다든가.

그런데 인간이란 복잡한 존재다. 직접 겪지 않는 사람들이 상상하기 힘든 관계가 펼쳐질 수 있다. 17-18세기 마다가스카르에서 벌어진 상황을 분석한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해적 계몽시대 Pirate Enlightenment: or the Real Libertalia〉(2019)는 그래서 재미있다.

데이비드 그레이버, 〈해적 계몽시대〉. 백여 쪽의 짧은 책에 상상력을 자극하는 내용이 많이 담겨있다.

데이비드 그레이버, 〈해적 계몽시대〉. 백여 쪽의 짧은 책에 상상력을 자극하는 내용이 많이 담겨있다.

1724년에 2권으로 나온 〈해적 통사 A General History of the Pyrates〉의 상권에는 유명한 해적들이 그려져 있다. 드라마틱하게 윤색되기는 했어도 실제 사실과 연결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하권에는 황당무계한 내용이 많이 들어 있다. 그중 하나가 마다가스카르에 존재했다는 “리버탈리아 Libertalia”란 이름의 해적국가 이야기다. 모든 재산을 모든 국민이 공유하는 이상향으로 그려져 있다.

〈해적 통사〉 1권 표지. 저자 이름 “찰스 존슨 선장”을 대니얼 디포의 갸명으로 보는 연구자들이 많다.

〈해적 통사〉 1권 표지. 저자 이름 “찰스 존슨 선장”을 대니얼 디포의 갸명으로 보는 연구자들이 많다.

인도양 해적 활동의 주요 거점이던 마다가스카르는 많은 해적의 은퇴지이기도 했다. 공권력의 위협이 없고, 현역 해적들과의 연계를 통해 장물 처리 등 경제활동의 길도 있었다. 유럽인 통치 지역에(본국이든 식민지든) 은퇴하려면 막대한 뇌물이 필요했고, 은퇴할 나이까지 살아남은 해적 대다수는 마다가스카르처럼 외진 곳에서 여생을 보낼 길을 찾았다. 〈해적 통사〉의 저자가 그곳을 리버탈리아의 무대로 설정한 배경이다.

생트마리섬의 해적 묘지. 마다가스카르 동북해안의 이 섬은 16-17세기 인도양 곳곳에 만들어진 외래인 기지의 하나였다. 기지를 만든 집단이 해적세력이었다는 점이 특색이다.

생트마리섬의 해적 묘지. 마다가스카르 동북해안의 이 섬은 16-17세기 인도양 곳곳에 만들어진 외래인 기지의 하나였다. 기지를 만든 집단이 해적세력이었다는 점이 특색이다.

그레이버는 〈해적 통사〉의 저자를 대니얼 디포(1660?-1731)로 추정한다. 항해-해적 활동에 관한 깊고 넓은 지식과 선구적 계몽사상, 그리고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재주를 겸비한 인물이라는 이유다. 그리고 그 시기 마다가스카르의 실제 상황이 ‘리버탈리아’ 그대로는 아니라도 그런 상상에 적합한 조건이었음을 밝힌다.

〈로빈슨 크루소〉(1719)의 저자 대니얼 디포는 영국 문학에서 소설의 위상을 확립한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거니와, 정치사상 전파에 열심인 운동가이기도 했다. 1703년 투옥되어 조리돌림(pillory)을 당할 때 군중이 돌멩이 아닌 꽃을 그에게 던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이야기를 담은 제임스 아미티지의 1862년 그림.

〈로빈슨 크루소〉(1719)의 저자 대니얼 디포는 영국 문학에서 소설의 위상을 확립한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거니와, 정치사상 전파에 열심인 운동가이기도 했다. 1703년 투옥되어 조리돌림(pillory)을 당할 때 군중이 돌멩이 아닌 꽃을 그에게 던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이야기를 담은 제임스 아미티지의 1862년 그림.

이주민-원주민 관계를 상상한다.

그레이버가 “내재적 외래인(internal outsider)”으로 표현한 양상이 눈길을 끈다. 외래인의 정체성을 부분적으로 지키면서 현지 사회에 구조적으로 편입된 양상을 말하는 것이다. 현지 사회에 변화의 계기가 닥쳤을 때 외래인의 존재가 중요한 촉매 역할을 맡을 수 있다.

그레이버는 현지 여권(女權)과 관련된 해적의 역할을 예시한다. 원래 마다가스카르의 원주민 사회는 모계(母系)가 일반적이었는데, 10세기 이후 이슬람과 유대교 등 유일신교가 들어오면서 가부장제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유럽인 해적은 여성에게 결혼 상대로서 새로운 옵션을 제공했다.

해적들은 현지인보다 우월한 무기와 많은 재물을 가져왔지만 생활을 현지인 아내에게 의지해야 했다. 여성은 해적을 등에 업고 역할을 키울 수 있었다. 그레이버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시기 (마다가스카르) 동북부에 인간 활동의 적어도 두 개 별도 영역이 있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나는 완력이 지배하는 남성의 영역으로, 여자들은 가축과 함께 종속적인 존재였다. 자라나고 있던 또 하나 영역은 마술과 상업과 섹스의 영역으로, 여성이 대등한 역할을 맡고 우월한 위치에 설 때도 많았다. 해적들이 처음 들어간 곳은 당연히 첫째 영역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성의 역할이 더 두드러지게 되었다.” (65쪽)

그레이버는 해적과 그 자손들이 현지 사회에 나름대로 적응한 여러 가지 양상을 소개한다. 현지 사회도 16세기부터 빠른 변화를 겪고 있었다. 미래가 불확실해진 현지인에게 전직 해적(과 그 자손)들이 독특한 리더십을 제공할 다양한 기회가 나타났다. (군사-생산) 기술적 리더십이든, (교역활동을 통한) 경제적 리더십이든, (특이한 존재로서) 상징적 리더십이든.

남양에는 외래인의 진입이 늘 계속되었다. 조금씩 들어오던 침투기에서 교착기를 거쳐 대거 진입하는 식민기와 정복기에 이르기까지 외래인과 현지인의 관계 양상이 역사 전개의 중요한 지표였다. 해적 아닌 외래인이라도 마다가스카르의 해적처럼 현지 사회에 다양한 자극을 주며 현지인과 어울려 변화를 겪어나갔을 것을 상상한다. 그 변화의 방향은 자기네 출신지의 기존 질서를 향한 것만도 아니었을 것이다.

마다가스카르 침공(1894-95) 시기 프랑스의 선전 포스터. 한반도의 2.5배가 넘는 면적(587,041 평방km)의 이 섬에는 기원 전후에 남양인 정착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16세기에 유럽인이 처음 왔을 때는 부족 단위를 넘어서는 정치조직이 거의 없었는데 19세기에 강력한 메리나 왕조가 세워져 외세에 굳세게 저항하기에 이르는 과정이 흥미롭다.

마다가스카르 침공(1894-95) 시기 프랑스의 선전 포스터. 한반도의 2.5배가 넘는 면적(587,041 평방km)의 이 섬에는 기원 전후에 남양인 정착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16세기에 유럽인이 처음 왔을 때는 부족 단위를 넘어서는 정치조직이 거의 없었는데 19세기에 강력한 메리나 왕조가 세워져 외세에 굳세게 저항하기에 이르는 과정이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