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 1953년 이란 정부 전복작전…9·11테러 씨앗 뿌리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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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2호 30면

[제3전선, 정보전쟁] 정부 전복작전의 교훈

1953년 이란 쿠데타는 미국이 모사덱 정부를 전복시킨 사건이다. 테헤란에서 쿠데타 지지자들이 승리를 축하하는 모습. [사진 위키피디아]

1953년 이란 쿠데타는 미국이 모사덱 정부를 전복시킨 사건이다. 테헤란에서 쿠데타 지지자들이 승리를 축하하는 모습. [사진 위키피디아]

커밋 루즈벨트 주니어는 정보전이 펼쳐지는 정글과는 어울리지 않을듯 싶은 금수저 중의 금수저였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손자로 하버드대를 졸업했다. 하지만 그만큼 타고난 역량의 정보요원도 없었다. 그의 화려한 배경은 신분 위장과 인맥 구축 등 오히려 정보활동에 도움이 됐다. 애국심과 모험심, 열정과 영리함 등 정보요원이 가져야 할 덕목들도 두루 갖췄다. 2차 대전 때에는 중앙정보국(CIA) 전신인 전략사무국(OSS)에서 일하며 이름을 날렸다. 그런 그가 1953년 7월 19일 비밀리에 이란에 입국했다.

이란 공산당인 투데당과 연합하려는 모하마드 모사덱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티피 아작스(TP-Ajax) 작전’ 수행이 그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이는 미국의 중동 헤게모니 장악의 서막인 동시에 이란과 중동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었다. 더욱이 9·11테러의 씨앗을 뿌린 사건이라는 점에서 아직도 그 흔적이 미국사회를 떠돌고 있다.

루즈벨트 손자가 ‘아작스 작전’ 주도

아작스 작전 당시 CIA 요원 커밋 루즈벨트 주니어. [사진 하버드매거진]

아작스 작전 당시 CIA 요원 커밋 루즈벨트 주니어. [사진 하버드매거진]

아작스 작전의 기운은 1950년 움트기 시작했다. 발단은 석유였다. 이란에서 대규모 석유를 발견한 영국의 자원 수탈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이란의 감정이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란 국민전선의 모사덱 당 대표가 석유산업의 국유화를 외치며 총리에 당선됐다. 1951년 4월 28일 이란 의회는 압도적 찬성으로 그를 총리로 선출했다. 총리에 취임한 모사덱은 예상대로 1952년 5월 1일 석유산업 국유화를 발표했다. 다급해진 영국은 모사덱 총리 축출을 위해 미국과 공동 정보작전을 제안했다. 그러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이란의 국유화 조치는 영국의 수탈이 심해 발생한 것이라며 원만한 타협을 권했다. 영국의 제안을 완곡히 거부한 것이다.

그런데 1953년 들어 정국 변화가 발생했다. 미국에서는 트루먼의 후임으로 아이젠하워가 새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란에서는 물가폭등과 생필품 부족으로 사회불안이 심화되자, 모사덱 총리가 위기 돌파를 위해 투데당과 연합을 추진했다. 이를 지켜본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당황했다. 모사덱 총리와 투데당이 연합할 경우 이란의 공산화는 물론 중동 전체가 소련의 영향권으로 빨려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모사덱 정부 전복 방안을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한국전쟁을 치르고 있어서 군사력을 통한 해법은 부담이 컸고, 모사덱 정부의 민족주의 성향으로 봐서 외교적 해법도 실효성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정보를 선택했다. 정보의 기본 임무는 군사 또는 외교적 수단으로 국가의 정책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울 때 비밀리에 나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CIA에 모사덱 정부 전복 임무가 맡겨졌다. 영국 정보당국이 이미 검토해 놓은 안(案)을 토대로 CIA는 일사천리로 작전을 진행할 수 있었다. 1953년 6월 25일 국무장관, 국방장관, CIA국장 등이 모여 아작스 작전이 확정됐다. 이어 7월 1일 윈스턴 처칠 총리의 동의와 7월 11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최종승인을 얻어 즉각 작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계획과 달리 실전은 반전의 연속이었다.

현장 책임자로 임명된 루즈벨트는 이란에 도착하자마자 선박·금융·부동산 재벌인 이란의 라시드 형제를 앞세워 정·관계와 종교계, 군부의 반(反) 모사덱 세력을 규합했다. 돈으로 매수한 용병 시위대도 조직했다. 팔레비 국왕을 만나 퇴역 장군인 파졸라 자헤디를 새 총리에 임명하는 문제도 조율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루즈벨트는 1953년 8월 12일 작전실행에 들어갔다. 먼저 모사덱을 해임하고 자헤디를 신임 총리로 임명하는 국왕 칙령을 전격 발표했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 사실을 전국에 알리고, 동시에 용역 시위대에게 거리 데모와 폭력 난동을 지시했다. 극도의 무질서와 혼란을 연출해 모사덱 총리의 해임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이란의 제30대 총리를 역임한 모하마드 모사덱. [사진 위키피디아]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이란의 제30대 총리를 역임한 모하마드 모사덱. [사진 위키피디아]

그러나 모사덱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란 국민들의 지지가 두터웠다. 왕족 출신이면서도 공화정치를 통해 이란을 발전시키겠다는 그의 정치철학이 국민의 신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총리로 뽑아준 의회도 우군이었다. 이같은 힘을 바탕으로 모사덱은 즉각 반격에 나섰다. 먼저 국왕의 칙령은 의회 의결을 거치지 않아 무효임을 국민들에게 알렸다. 이란 헌법상 국왕 칙령은 의회 의결을 거쳐야 효력이 발생하는데, 모사덱은 칙령이 자신에게 도착하기 전에 의회를 먼저 해산시켜 버렸다. 불길한 예감을 느낀 루즈벨트는 국왕 근위대를 시켜 칙령을 모사덱에 직접 전달하고 저항할 경우 체포하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모사덱은 자신을 체포하러 온 근위대를 오히려 체포해 버렸다. 그리고 즉시 라디오를 통해 “쿠데타는 실패했다”고 공표해 버렸다. 뉴스를 접한 반정부 시위 세력은 전의를 잃고 사분오열됐다. 팔레비 국왕마저 이태리로 도주했다.

CIA 본부는 난감해졌다. 8월 17일 작전이 실패할 것으로 판단한 CIA는 루즈벨트에게 미국의 개입 사실을 은폐한 후 급히 탈출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포기하지 않았다. 8월 18일 마지막 카드를 던졌다. 남은 공작금으로 대규모 용역 시위대를 다시 조직하는 한편 노선갈등으로 모사덱과 멀어진 시아파 종교지도자 모하마드 베바하니의 협력을 확보했다. 반면 모사덱 총리는 반정부 세력을 진압한 것으로 판단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결집한 지지자들을 해산시켰다. 루즈벨트는 사력을 다해 마지막 총력전을 펼친 반면, 모사덱은 상황이 진정된 것으로 알고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결정적 실수였다.

이같은 상반된 움직임 속에 운명의 8월 19일 아침이 밝았다. 루즈벨트는 마지막 카드에 올인했다. 용역 시위대를 앞세워 거리 데모를 다시 진행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민생고와 실정에 불만이 쌓인 시민들이 가세하기 시작했다. 특히 베바하니가 규합한 이슬람 시위대도 합류했다. 여기에는 1979년 이슬람 혁명을 이끈 아야톨라 호메이니도 있었다. 거리를 메운 시위대들은 “국왕 만세”와 “모사덱 반대”를 외쳤다. 반전이 시작됐다. 급기야 폭력으로 돌변한 시위대는 정부청사와 투데당 당사 등을 부수고 불태웠다. 루즈벨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시위 진압 명분으로 군대를 출동시켜 모사덱 총리를 전격 체포했다. 루즈벨트는 CIA본부에 바로 타전했다. “아작스 작전 성공”.

CIA, 작전 실패했다고 판단해 탈출 지시

정보전쟁

정보전쟁

실패할 줄 알았던 아작스 작전은 마지막 순간 급반전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작전의 성공으로 미국은 소련의 중동 영향력 확장을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었다. 또한 2차 대전 이후 초강대국으로 올라 선 미국이 중동의 헤게모니까지 장악하는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비록 단기적으로 볼 때 작전은 성공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어마어마한 후과를 남겼다. 서방세력에 의한 인위적 정권 교체는 중동 민족주의가 발흥하는 원인을 제공했고, 이는 끝을 알 수 없는 중동분쟁으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국제사회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더욱이 아작스 작전으로 확산된 반미 감정은 오사마 빈 라덴과 같은 극단적 이슬람 세력을 탄생시켜 급기야 9·11테러로 이어졌다. 이처럼 아작스 작전의 후폭풍은 엄청난 희생과 비용을 초래했고 아직도 미국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래서 미국은 이 사건을 회한과 자성으로 돌아보고 있다. 2000년 3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모사덱 정권 전복은 실수였다고 인정한 것이나 2009년 6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모사덱 정부 전복에 미국이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시인한 것은 그 예이다. 중동 화해의 뜻과 함께 아작스 작전의 교훈을 잊지 말자는 뜻도 담겨 있다. 아작스 작전은 비록 국가이익에 부합하더라도 민심을 아프게 하는 정보 활동은 후일 부작용이 따를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2013년 아작스 작전 60주년을 맞아 CIA가 작전개요를 일부 공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비록 법적, 윤리적 가치보다 국익을 우선하는 정보 관행이 용인된다 하더라도, 시대 변화와 교감하지 않을 경우 여론의 미움을 사 더 큰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자성이 엿보인다. 정보는 이런 딜레마적 고민과 씨름하면서 조금씩 진보해 나갈 것이다. 여론을 중시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최성규 고려대 연구교수. 국가정보원에서 장기간 근무하며 국제안보 분야에 종사했다. 퇴직 후 국내 최초로 비밀 정보활동의 법적 규범을 규명한 논문으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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