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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은주의 아트&디자인

관람객 마음을 훔쳤다, 방의걸의 속 깊은 수묵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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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은주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후두둑 후두둑. 깊은 숲에서 나뭇잎을 두드리며 세차게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어보신 적 있나요. 빛이 일렁이는 바다는 또 어떤가요.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 그 이름도 아름다운 ‘윤슬’을 넋 놓고 바라본 적 있으신지요.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방의걸(86) 화백의 개인전 ‘생성의 결’(29일까지, 무료)을 보았다면 제가 왜 이런 얘기를 꺼냈는지 아실 겁니다. ‘생성의 결’은 ‘비’와 ‘물결’ 연작 등을 선보이고 있는 수묵화 전시인데요, 그곳에서 마음이 울컥하고 평온해지는 경험을 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전시 방명록엔 그런 속마음을 털어놓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빼곡합니다.

방의걸,해맞이, 2023, 한지에 먹, 263213㎝. [사진 방의걸 예술연구소]

방의걸,해맞이, 2023, 한지에 먹, 263213㎝. [사진 방의걸 예술연구소]

“힘든 삶의 여정 속에서 잠시 쉬어갑니다” “동행이 없었다면 맘 놓고 눈물을 흘렸을 것 같습니다” “빗소리를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신의 감상을 이런 글로 갈음하고 간 사람도 있습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내쉰다/한 걸음 한 걸음/나는 그림 속으로 걸어간다/한 걸음 한 걸음”. 이런 방명록은 지난 3개월 수십 권으로 불어났습니다.

방 화백은 ‘은둔형 예술가’였습니다. 전북 고창 태생인 그는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뒤 40여 년간 전남대 미술과 교수로 재직하며 전주에서 홀로 ‘절필’과 ‘작업’을 반복했습니다. 2014년 서울 인사아트센터에서 전시를 열기 전까지 화가로서 서울에 모습을 드러낸 일도 없었습니다.

방의걸, 안개비,2022,한지에 먹, 205x69.5cm. [사진 방의걸예술연구소]

방의걸, 안개비,2022,한지에 먹, 205x69.5cm. [사진 방의걸예술연구소]

방의걸,저너머, 한지에 먹, 2022, 210x74cm. [사진 방의걸예술연구소]

방의걸,저너머, 한지에 먹, 2022, 210x74cm. [사진 방의걸예술연구소]

그러다 2020년 서울옥션강남 개인전과 2021년 메종 바카라 초대전, 2023년 아르떼뮤지엄 미디어 아트 전시를 열었고, 이번에 더 큰 전시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관람객 중엔 예술의전당을 찾았다가 우연히 전시를 본 이들이 적잖습니다. “수묵화 전시는 생전 처음”인 초등학생과 20~30대부터 “너무 좋아서 친구 데리고 또 왔다”는 중년 등등.

평론가들은 방 화백이 자신만의 현대적인 표현으로 추상과 구상, 빛과 어둠의 세계를 넘나든다고 말합니다. 또 농담(濃淡)을 달리한 섬세한 붓질로 숲의 공기와 빛, 물결의 리듬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합니다. 한마디로 현대적 수묵화라는 평가입니다.

전시장에서 만난 화가는 “먹빛으로 어둠을 뚫고 나오는 빛을 표현하고 싶었다”며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될 때 에너지(희망)가 생성된다는 이야기를 전하고자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바람이 이뤄지고 있는 걸까요. ‘생성의 결’ 전시장은 ‘연결의 장(場)’ 그 자체입니다. 관람객은 그림을 보며 잠시 위로받고, 그곳에 마음을 담아 정겨운 손글씨로 시(詩)를 남겼습니다. 노(老) 화가는 자신의 그림이 세대 차를 뛰어넘어 보는 사람의 마음을 다독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계속 작업할 힘을 얻습니다. 한 화가가 60년 동안 꿈꿔온 ‘연결’과 ‘생성’이 그곳에서 지금 현실로 이뤄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