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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동의 최초의 질문

최초의 질문으로 혁신을 선도하는 수요자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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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매일같이 밤새워 고민하는 기업 A가 있다. 반대로 기술혁신은 나 몰라라, 겉보기에 번듯한 짝퉁에 만족하는 얌체 기업 B가 있다. 안타깝게도 소비자 10명이 품질과 가격, 혁신성을 꼼꼼히 따져보지도 않고 제품 하나를 임의로 찍어 산다면 기업 A와 B의 시장점유율은 확률적으로 얼마가 될까. 당연히 50대 50 절반씩이다. 혁신적 기업이나 그렇지 않은 기업이나 기대할 수 있는 보상은 같다.

그런데 10명의 소비자 모두가 꼼꼼히 비교해서 혁신적인 기업의 제품을 산다고 가정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A 기업의 시장점유율은 100%이겠지만, B 기업은 단 한 개의 제품도 팔지 못하고 시장에서 퇴출당할 것이다. 시장에 이런 똑똑한 소비자들만이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된다면, 새로 진입하는 기업은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기술혁신을 위해 밤을 새울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수요자가 똑똑해질수록 혁신적인 기업의 시장점유율이 높아지고, 비로소 시장의 창조적 파괴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기술혁신, 수요자 접점서 생겨나
수요자가 깨어있을 때 혁신 발생
스마트폰·K팝 성공도 마찬가지
소비자 육성 듣는 조직 만들어야

너무나 상식적인 이 보기는 산업의 혁신을 유도하는 데 수요자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잘 보여준다. 혁신이 탄생하는 데 천재적인 과학기술자나 탁월한 기업가와 같은 공급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수요자가 얼마나 예리한 눈을 가지고, 엄격한 선택 압력을 행사하는가도 그에 못지않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소비자 눈 까다로운 한국 시장

삼성전자 갤럭시 S24 시리즈가 공개 된 지난 1월 중순 서울 영등포구 타임스퀘어에 마련된 갤럭시AI 체험공간 ‘갤럭시 익스피리언스 스페이스’에서 실시간 번역 통화가 시연되고 있다. [뉴스1]

삼성전자 갤럭시 S24 시리즈가 공개 된 지난 1월 중순 서울 영등포구 타임스퀘어에 마련된 갤럭시AI 체험공간 ‘갤럭시 익스피리언스 스페이스’에서 실시간 번역 통화가 시연되고 있다. [뉴스1]

한국의 스마트폰 시장에 유난히 신기술을 장착한 제품이 많이 출시되는 것은 한국 소비자의 눈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OECD 국가 가운데 한국 스마트폰 교체주기가 가장 짧다는 통계도 한국 스마트폰 소비자 선택압력이 얼마나 높은지를 보여주는 간접적인 증거 중 하나다.

한국의 K팝 업계에 새로운 플레이어가 끊임없이 등장하고, 또 그만큼 빠르게 소멸하는, 이른바 창조적 파괴가 활발히 일어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K팝의 테스트베드인 한국의 소비자, 그리고 그 소비자의 이해를 대변할 수밖에 없는 프로듀싱 업계의 선택압력이 유난히 높고 가차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세계가 깜짝 놀라는 K팝의 진화속도다.

몇 년 전 세계무대에서 선전하고 있는 국내 첨단 현미경 기업을 방문했을 때 접했던 이야기도 비슷하다. 첨단 현미경의 주된 응용분야인 반도체 산업으로 진출하기 위해 창업자가 반도체 대기업을 찾아갔을 때, 10여 개의 문제가 담긴 요청사항을 받았다. 그 문제들을 풀 수 있다면 현미경을 구입해주겠다는 일종의 테스트였다. 반도체 분야의 응용 경험이 충분하지 않던 벤처기업의 입장에서는 하나같이 접해보지 못했던 까다로운 문제들이었다. 문제를 던진 대기업도 해결방안이 없는 것들이니 쉽게 말하면 도전적인 ‘최초의 질문’들을 받아든 것이었다.

밤을 새워 하나씩 질문에 대한 해답을 구해나가는 동안 기업의 기술 역량이 훌쩍 성장하였고, 납품으로 이어지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 경험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통하는 기술 리더십을 갖게 된 숨은 비법이었다는 것이 스토리의 핵심이다. K팝뿐만 아니라 최첨단의 반도체 산업에서도 기업이 혁신을 위해 달려가도록 선도하는 최초의 질문자가 바로 수요자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쉬운 발전 경로 택한 남미·동남아

수출시장에 일찍이 나선 것이 한국 산업의 가장 중요한 성장요인이었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1970년대부터 허술한 제품을 들고 수출 시장에 나선 결과 온갖 종류의 클레임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 기업의 수준으로는 클레임 하나하나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난제였다. 이것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가면서 역량이 쌓여갔고, 첨단 제품을 수출하는 것을 넘어 이제는 글로벌 기업들이 한국 시장을 가장 까다로운 테스트베드로 여기는 수준에 이르렀다.

당시 여러모로 우리보다 여건이 나았던 남미와 인도, 그리고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수입대체 전략이라고 불리는 내수시장 중심의 쉬운 발전 경로를 택했다. 그 결과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다. 이들 국가의 기업들은 수출 시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만만한 국내 시장의 요구사항들을 대하면서 손쉬운 이윤에 만족하게 되었고, 그러는 동안 기업들의 기술 역량은 국제적 수준에서 점점 뒤떨어졌다. 이제는 다시 추격하기 어려운 격차만이 남아 있다.

과학적 발견은 연구실에서 일어나지만 기술 혁신은 수요자와 만나는 시장에서 탄생한다. 혁신을 요구하는 까다롭고 수준 높은 수요자의 요구, 즉 시장이 던지는 최초의 질문이 기술혁신의 인센티브와 방향을 결정적으로 좌우한다. 그 결과 혁신에 게으른 기업이 퇴출당하도록 하는 엄격한 진화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게 된다.

연구개발 투자로 혁신적 기술을 만드는 것이 기술 진화의 한 면이라면, 날카로운 수요자의 목소리로 옥석을 골라내는 과정은 그 동전의 다른 면이다. 혁신적인 기업이 되려면 까다로운 소비자의 목소리가 회사 내에 더 크게 들리도록 시스템을 가다듬어야 한다. 나아가 앞서 첨단 현미경 회사가 그러했듯 상대하기 어려운 수요자를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일부러 찾아가야 한다. 그래서 수준 높은 수요자의 목소리가 기술 진화의 동력이 되도록 해야 한다.

기술 혁신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다른 혁신 과제들에서도 수요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심지어 선거철을 맞아 한창 열기를 더해가고 있는 정치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혁신하는 국회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혁신 지향적인 후보자를 알아보고 표를 행사하는 유권자의 날카로운 선택 압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기술이나 정치나 수요자가 깨어있고, 목소리를 낼 때 혁신의 진화가 일어난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