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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원의 이코노믹스

적극적인 재정정책 통해 금융·산업 구조조정 나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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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일본 ‘잃어버린 30년’의 시사점

김동원 전 고려대 초빙교수

김동원 전 고려대 초빙교수

한국 경제의 기간별 연평균 성장률은 2001~2008년 4.9%에서 2011~2019년 2.9%, 2020~2023년 1.9%로 낮아지는 추세에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24~2028년 연평균 성장률을 2.2%로 전망했다. 장기적으로는 이러한 저성장 기조가 인구 감소와 고령화에 의해 주도된다는 점에서 한국 경제가 ‘잃어버린 30년’으로 지칭되는 일본 경제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우리 사회에 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저성장 기조의 긴 경험을 가진 일본의 사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 금융 완화로 생산성 약해져
기업 경쟁력 낮아도 생존 연장

한국, 저출생·고령화로 저성장
IMF, 24~28년 2.2% 성장 전망

수출 의존도 커 대외 충격 취약
양극화로 금융시스템 위험 고조

2023년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72명을 기록해 통계청 장기 인구 추계의 중위 가정과 일치했다. 중위 가정 추계에 따르면 2022년 대비 2032년 총인구는 54만명, 경제활동인구는 332만명이 감소하는 반면, 65세 이상 고령 인구는 485만명이 증가하는 것으로 전망됐다. 한편 한국개발연구원(KDI·2022년)에 따르면, 한국 경제의 성장률 전망치는 2030년대 1.3%, 2040년대 0.7%로 낮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은행의 연구(2023년, 조태형)에서는 높은 생산성을 가정한 경우 2030년대 전반 1.3%, 후반 0.6%로 추정됐고, 중간 생산성의 경우엔 2030년대 전반 1.1%, 후반 0.5%까지 낮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일본 기업, 금융 거품으로 생존 연장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일본 경제의 ‘잃어버린 30년’은 장기 불황·디플레이션(물가 하락)·자산 시장 장기 침체로 집약된다. 일본 경제는 1992년부터 2019년까지 28년간 연평균 성장률 0.84%, 소비자물가상승률 0.28%, 실업률 3.9%의 장기 침체를 겪었다. 한편 도쿄의 상업지 가격은 1983년을 100으로 할 때 1991년 341.3까지 급등했으나 2005년 71.3으로 81% 하락했다. 일본종합주택가격지수(일본부동산연구소)는 1993년 7월 대비 2005년 5월까지 59% 하락한 뒤 2023년 12월 현재 39% 하락한 수준으로 회복했다. 또한 일본 증시의 닛케이평균지수는 지난달 34년 만에 1989년의 정점을 회복했다. 그동안 세계 상품 수출 시장에서 일본의 비중은 1993년 9.8%에서 2022년 3.65%로 낮아져 일본 제조업의 영광은 사라지고, 서비스업은 만성적인 저생산성의 늪을 벗어나지 못했다.

일본 경제의 장기 침체엔 정부의 경제 정책 실패에 상당한 책임이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인구 감소와 엔고로 인한 수출 경쟁력 저하로 제조업의 투자가 침체한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경기 진작을 위해 금융 완화 정책을 장기간 추진했다. 이에 따라 경쟁력을 상실한 기업들이 구조조정 없이 금융 거품 덕에 생존을 연장함으로써 경제 전반의 생산성은 현저하게 낮아졌으며, 그 결과 성장 동력은 지속적으로 약화했다. 반면 장기 침체에도 2022년 기준 국내총생산(GDP)의 6%에 달하는 대외 투자 수입으로 경상수지 흑자를 지속함으로써 국제 투기자본의 공격 등의 위협을 피할 수 있었고, 자산 시장의 극심한 거품 붕괴에도 금융 위기의 위험을 겪지 않았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특히 서비스업의 생산성이 낮고, 노동시장의 이중 구조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양극화 문제가 심각하지 않았다는 점이 주목된다.

한국, 장기 침체보다 경제위기 위험 커

정근영 디자이너

정근영 디자이너

한국 경제의 저성장 기조는 일본 경제와는 상당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단적으로 2022년 한국의 무역의존도는 84.6%지만 일본의 무역의존도는 47.6%로 격차가 현저하다. GDP에서 차지하는 제조업 비중도 한국 24.3%(2023년), 일본 20%로 차이가 있다. 즉 일본  경제가 내수 중심인 데 비해 한국 경제는 수출 중심을 특징으로 한다. 그 결과 한국 경제는 역동성이 강하지만 대외 여건에 따라 변동성이 높고 충격에 민감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양극화 문제를 안고 있다. 따라서 한국 경제는 장기 침체 위험보다도 경제 위기의 위험성이 더 크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저성장 기조로의 전환으로 한국의 자산 시장은 이미 거품이 빠지는 장기 조정 양상을 보이고 있다. 국내 증시의 코스피 지수는 2021년 6월 정점과 비교해 이달 현재 19% 하락했다. 한국부동산원의 서울 공동주택가격지수는 2021년 10월을 정점을 기록한 뒤 지난해 12월까지 12.5% 하락했다. 저성장 기조가 확산하면 자산 시장에 지속 성장의 기대감과 동력이 약화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정근영 디자이너

정근영 디자이너

그러나 한국의 자산 시장은 일본과 달리 금융 거품의 작용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큰 폭의 가격 하락 위험은 크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저성장 기조를 배경으로 한 양극화의 심화와 자영업 대출의 부실 위험이 주목된다. 양극화는 자영업의 장기 침체를 구조적으로 심화시키고 있으며, 그 결과 자영업 대출의 부실 위험은 심각하게 커지고 있다.

2023년 3분기 말 현재 자영업자 대출은 1052조6000억원에 이른다. 3개 이상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은 다중채무자의 대출 비중은 2019년 말 68.6%에서 2023년 6월 말 기준 71.3%로 높아졌다. 특히 저소득·저신용의 취약 차주 비중은 2023년 9월 말 기준 11%에 달하고 있어 자영업자 대출의 부실 문제가 급속하게 악화하고 있다. 문제는 저성장 기조로 인한 소비 위축으로 자영업의 침체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한편 상장 기업 중 영업이익으로 이자 비용을 충당하지 못하는 기업 비중은 2023년 6월 현재 대기업 30.9%, 중소기업 58.9%에 달하고 있어 제조업에서도 양극화로 인한 부실 위험이 커지고 있다.

산업 경쟁력 강화, 저성장 탈출 열쇠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이 갈 수 있는 저성장 기조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시나리오가 있다.

①금융 및 대외 충격 발생에 따른 경착륙(hard-landing): 위기를 맞을 위험성이 큰 경우다. 저성장이 심각한 문제인 이유는 저성장이 금융과 실물 그리고 대내와 대외에 걸쳐 다중 복합적으로 위기를 촉발할 수 있는 위험이 높은 생태계를 조성한다는 점이다. 장기 저성장이 경제 생태계를 악화시킴으로써 초래할 수 있는 경제 구조의 급격한 상태 변화를 정부가 차단하는 데 실패할 경우,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처럼 경제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 양극화의 장기화로 취약 산업과 취약 계층의 경제 활동이 약화하면서 금융 부문의 시스템 위험이 커지고 있으며, 주력 수출 산업의 경우 대규모 장치 산업의 특성상 세계 경기 변동에 신축적 대응이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한국 경제는 기초 체력이 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②연착륙(Soft-landing) 성공: 한국 경제가 경제 위기를 피하고 연착륙에 성공하는 경우는 장기 저성장 경로에 가깝다. 이마저도 쉬운 길이 아니다. 연착륙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영업 대출·가계 대출 및 기업 부문의 부실로 인한 금융 시스템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잠재적 부실 자산 정리를 선제적으로 추진해 전반적인 경제 활동을 건실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고름을 제거해야 먼 길을 갈 수 있듯, 성장은 낮아져도 건전한 경제 활동을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다.

③연착륙과 구조 개혁 병행: 구조 개혁을 통해 경제 전반의 역동성을 높이는 길이다. 금융 부실 정리와 함께 산업 구조조정을 통해 산업 양극화 완화에 나선다. 더불어 반도체·자동차·조선·방산 등 주력 수출 산업의 투자를 촉진해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한다면 성장의 역동성을 높여 저성장 압력을 완화할 수 있다. 세계 상품 수출 시장에서 한국 비중이 2017년 3.95%로 정점을 찍은 뒤 2022년 3.34%로 낮아지고 있다는 점은 산업 경쟁력 확보가 이미 절박한 과제임을 보여준다.

건전재정 위해 정부 역할 외면 말아야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의 경험은 한국 경제에 세 가지 시사점을 준다. 첫째, 장기적인 금융 완화 정책은 자원 배분의 비효율성을 높인다. 둘째, 구조조정을 미룰수록 생산성이 저하돼 저성장 기조가 심화한다. 셋째, 구조 개혁과 총요소 생산성을 높이는 데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이 요구된다. 즉 일본의 경험은 축구에서만 공격이 최선의 방어가 아니라 경제에서도 성장이 최선의 대책임을 시사한다.

앞서 언급한 저성장 관련 세 가지 시나리오에서 한국 경제의 진로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정부의 역할이다. 특히 저성장 기조가 더 심화하면, 연금 개혁과 노동 개혁을 단행하는 것이 더 어려워진다. 한편 금융과 실물, 대내외의 다중 복합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정책 복합(policy mix)과 정책 우선순위의 선택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며, 건전 재정에 집착해 정부의 역할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정부는 재정의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사전적으로 금융과 산업 양면의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금융 위기 위험을 선제적으로 차단하는 한편 규제 개혁과 주력 산업의 투자 촉진을 통해 성장의 역동성을 적극적으로 제고하는 정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김동원 전 고려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