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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달의 예술

그대 부드러운 음성 나를 부르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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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

결혼식을 앞두고 신랑이 떠나버렸다는 소식을 들은 신부의 마음은 어떨까? 벨리니(V Bellini, 1801-1835)의 오페라 ‘청교도’에서 엘비라는 이 기막힌 상황에서 노래를 부른다. 오페라사에서 유명한 매드신(mad scene)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아리아의 시작은 애절하다. ‘그대 부드러운 음성 나를 부르고’. 그렇지만 정신을 잃을 정도의 분노와 허탈함은 격렬하게 내면의 감정을 폭발시킨다. 지난 3월 8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공연된 ‘청교도’(사진) 한 순간이었다. 엘비라 역을 맡은 소프라노 캐슬린 김은 고음역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섬세한 음성으로 청중들을 아름다운 벨칸토의 세계로 이끌었다.

19세기 벨리니 오페라 ‘청교도’
고도의 성악적 기량 잘 구현
환상 자극하는 게 오페라 매력

 [사진제공 세아이운형문화재단]

[사진제공 세아이운형문화재단]

34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벨리니의 마지막 오페라 ‘청교도’는 17세기 영국의 내전 중 크롬웰이 이끄는 청교도 공화파와 왕당파의 대결이라는 역사적 배경 속에서 벌어지는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청교도파 성주의 딸 엘비라는 청교도 기사 리카르도의 구애에도 불구하고 적군 왕당파의 아르투로를 사랑하였다. 다행히 그녀가 원하는 대로 결혼식을 거행하게 되지만, 왕당파의 왕비를 구출하기 위해 아르투로가 도주를 하는 바람에, 식은 무산된다. 우여곡절 끝에 실성한 엘비라는 사랑하는 아르투로를 만나 “300년 동안 당신을 기다렸다”고 노래하지만, 아르투로에게는 이미 사형선고가 내려진 상태이다. 그렇지만 청교도파 수장 크롬웰이 왕당파를 사면한다는 전령이 전해지면서, 두 연인의 사랑이 극적으로 이루어진다.

3막의 대하 오페라인 ‘청교도’는 이번에 ‘콘서트 오페라’(콘체르탄테)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오케스트라는 무대 중앙에 자리잡고, 주요 장면들을 중심으로 오페라가 펼쳐졌기에 노래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가 무대에 배치되어 있음에도 성악가의 노래를 전혀 방해하지 않으며, 섬세하게 음향을 조절하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또한 계단과 합창석을 적절하게 활용한 간결한 무대 장식과 조명을 통해 극의 분위기를 잘 살렸다.

벨리니

벨리니

역사적 사건과 개인의 요동치는 감정이 교차되며 진행되는 극적 내러티브는 벨리니의 손에서 벨칸토 아리아와 카바티나, 정교한 듀엣과 합창으로 풍성하게 구현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오페라는 고도의 성악적 기량을 요구하는 작품으로도 유명한데, 세기의 테너 파바로티도 가성으로 불렀다는 하이 F 음을 아르투로가 부른다.

이날 공연에는 소프라노 캐슬린 김(엘비라)을 비롯해 테너 손지훈(아르투로), 바리톤 이동환(리카르도), 베이스 박종민(조르조) 등 현재 최고의 기량을 펼치는 성악가가 출연하였고, 데이비드 이가 이끄는 서울시립교향악단, 노이오페라코러스가 표현진의 연출로 서로 호흡을 맞추며 고품격 공연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길고도 긴 멜로디, 아무도 쓰지 않았던 긴 멜로디’를 구사한 벨리니의 매력을 이번 공연에서 한껏 느낄 수 있었다. 2023년 차이콥스키 국제음악콩쿠르에서 한국인 테너 최초로 우승을 한 손지훈은 그야말로 청아하고 풍성한 음성으로 ‘그대, 오 사랑하는 이여’를 불러 청중의 탄성을 자아냈다. ‘사랑 때문에 죽을 것 같은’ 마음을 열정적으로 표현한 캐슬린 김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안정감으로 긴 프레이즈를 마무리하며 자신의 기량을 펼쳤다. 오페라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동환(리카르도)과 박종민(조르조)의 카리스마 있는 이중창은 오케스트라 음향과 균형감을 이루었고, 서울시향은 박진감 넘치는 사운드로 긴박한 극적 전개를 구현하였다.

공연을 관람하면서 오페라는 ‘격정적인 줄거리의 묘사에서 유쾌한 감성의 도움으로 청중의 환상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예술이며 모든 마법을 통일시키는 극적이며 서정적인 연극’이라고 칭송했던 루소(J J Rousseau)의 말이 떠올랐다. 청교도 혁명 세력이 영국의 찰스 1세를 처형하는 정치적 사건을 배경으로 긴장감 있게 펼쳐지는 극적 내러티브와 뜨거운 사랑을 부드럽고 긴 선율로 구사하는 벨리니의 음악이 함께 엮어내는 시간을 통해 오페라의 매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날 공연은 세아이운형문화재단(이사장 박의숙)의 기획 및 주관으로 진행되었다. 오페라를 사랑하며 한국 오페라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 고(故) 이운형 회장의 유지를 따라 창립된 이 재단은 성악가들을 발굴하고 장학사업을 통해 후원하는 등 한국 오페라계에 큰 역할을 하고 있으며, 정기적인 공연을 통해 폭넓은 청중이 오페라를 접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기업의 예술 후원이 앞으로 우리 음악계에 더욱 활발하게 나타날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