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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주정완의 시선

“국민연금 신·구 분리” KDI 처방 검토해볼 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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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주정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주정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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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마을 공동으로 운영하는 식당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식당에선 65세 이상 노인에게 밥을 나눠준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젊을 때 적어도 10년간 밥값을 쌓아둔 사람만 밥 먹을 자격이 있다. 65세 이상이라고 다 같은 밥을 주는 것도 아니다. 젊을 때 낸 밥값에 따라 손님을 차별한다. 밥값을 많이 낸 사람은 푸짐하게, 적게 낸 사람은 조금만 밥을 떠준다.

그런데 이 식당은 근본적 결함을 안고 있다. 손님이 낸 밥값보다 비싼 음식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밥을 많이 팔수록 이윤은커녕 손해를 본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잠재 부실이 엄청나다. 이런 식이면 언젠가 식당이 망할 수밖에 없다. 마을 젊은이들은 걱정이 앞선다. 밥 한번 먹어보지 못하고 밥값으로 쌓아둔 돈만 날릴지 몰라서다.

2055년 완전 고갈은 예고된 재앙
기존연금은 세금으로 지원하되
새 연금은 낸 만큼 받아가게끔

현재 우리나라 국민연금 제도를 식당에 비유하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당장은 멀쩡하게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현재대로 가면 국민연금 기금은 2055년에 완전히 바닥난다. 지난해 정부가 발표한 국민연금 재정 추계 결과다. 1990년생이 노령연금을 받을 65세가 되면 연금 기금이 한 푼도 남지 않는다는 얘기다.

정부나 국회나 정치적 부담이 큰 연금개혁에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는 건 마찬가지다. 얼마 전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산하 공론화위원회가 두 가지 대안을 냈지만, 내용은 실망스럽다. 하나는 더 내고 더 받기, 다른 하나는 더 내고 그대로 받기다. 둘 다 연금 고갈의 시기를 잠시 늦추는 ‘땜질 처방’일 뿐 근본적 해결책은 아니다. 손님이 낸 밥값보다 비싼 음식을 제공한다는 문제의 핵심은 여전하다. 오히려 미래 세대의 부담을 더욱 키우는 ‘독소 조항’까지 들어갔다.

대안은 없을까.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제안에 눈길이 간다. 현재 단일 체계인 국민연금을 둘로 나누는 게 제안의 핵심이다. 식당으로 치면 기존 식당과 새 식당의 둘로 쪼개자는 얘기다. 기존 식당은 어쩔 수 없더라도 새 식당은 운영 체계를 완전히 뜯어고치기 위해서다. 지금까지 연금개혁 논의의 틀을 뛰어넘는 신선한 발상이다.

좀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자. 기존 식당(기존 연금)에선 이미 손님에게 약속한 대로 밥을 준다. 이렇게 하면 막대한 적자를 피할 수 없다. 올해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609조원이다. 시간을 끌수록 적자는 눈덩이처럼 커진다. 이 돈은 전액 국가 재정으로 메운다. 약속을 지키면서도 식당이 망하지 않으려면 이 방법뿐이다.

새 식당(새 연금)에선 손님이 밥값을 낸 만큼만 밥을 준다. 100만원을 낸 사람이라면 원금 100만원에 수익금을 더한 만큼만 돌려받는 식이다. 전문용어로 하면 기대 수익비가 1이 되게 하자는 것이다. 신승룡 KDI 부연구위원은 “국민연금 기금 수익률이 높으면 더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기대 수익비 1도 그렇게 나쁜 숫자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얼핏 그럴듯하지만 쉬운 길이 아니다. 앞으로 넘어야 할 고비가 많다. 우선 세대 간 불평등이다. 같은 밥값을 냈더라도 손님이 속한 세대에 따라 식당의 밥이 달라진다. 먼저 태어난 세대는 좋은 밥을 먹겠지만, 나중에 태어난 세대는 그렇지 않다. 출생연도가 늦다는 이유만으로 불이익을 감수하는 건 공평하지 않다. 그렇다고 뾰족한 대안도 보이지 않는다.

600조원 넘는 잠재 부실을 메우는 데 들어갈 돈을 어떻게 감당하느냐도 문제다. 최근 저성장 흐름을 고려하면 세금을 대폭 올리긴 어렵다. 대규모 적자 국채 발행이 불가피하다. 결국 미래 세대에게 막대한 빚을 떠넘기는 셈이다.

세대 내 불평등도 고민해 봐야 한다. 현재 국민연금에는 소득재분배 기능이 있다. 밥값을 많이 낸 사람의 몫을 일부 덜어내 적게 낸 사람에게 나눠준다. 그런데 새 식당이 밥값만큼만 밥을 준다면 소득재분배가 어렵다. 같은 세대 안에서도 고소득층과 저소득층의 격차가 더욱 커질 수 있다. 사회보험인 국민연금과 민간 저축상품이 뭐가 다르냐는 말이 나올 것이다.

어쨌든 연금 재정의 안정은 KDI 제안의 최대 장점이다. 일정한 한계는 있지만 그냥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기존에 밥값을 낸 사람들은 약속받은 밥을 먹는다. 국가가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신뢰를 줄 수 있다. 새로 밥값을 내는 사람들은 그 돈을 못 받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강구 KDI 연구위원은 “젊은 세대의 동의를 받으려면 적어도 낸 만큼은 돌려받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꼭 이대로 하자는 건 아니지만 사실상 겉돌고 있는 연금개혁 논의에 전향적 발상이 필요한 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