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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 낮춰 시장 장악" 조선업으로 전선 넓힌 미·중 무역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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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오성홍기와 미국 성조기. 중앙포토

중국 오성홍기와 미국 성조기. 중앙포토

미국과 중국 간 무역전쟁 전선이 반도체에서 조선·해운 분야로 확대될 기미를 보이고 있다. 미국의 관련 노조 단체가 '가격 후려치기' 등 중국 조선 업체들의 불공정 경쟁을 문제 삼아 미 당국에 청원을 내면서다.

올해 대선을 앞두고 노조의 지지를 원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즉각 반응하며 관련 조사에 착수할 가능성을 나타냈다. 세계 1위의 중국 조선업이 미국의 강력한 견제와 규제를 받을 경우 2위인 한국 조선업 역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12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따르면 전미철강노조(USW), 국제기계항공노조(IAM) 등 5개 노조가 이날 미 무역대표부(USTR)에 "조선·물류·해양 분야에서 이뤄지는 중국의 행동과 정책, 관행에 대해 조사해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했다. 중국 업체들이 가격을 인위적으로 낮춰 시장을 장악하면서 미국 선박과 해운사가 차별받고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노조 측은 중국 조선업체들의 뒷배로 중국 정부를 꼽았다. 그간 중국은 '중국 제조 2025' 전략에 따른 10대 전략 육성 사업 중 하나인  조선업에 예산과 인재를 대거 투입해 왔다. 이와 관련, 노조 단체들은 청원서에서 "중국 정부의 이런 노력은 다른 어떤 국가보다 훨씬 공격적이고 개입주의적"이라며 "상당수가 국영인 중국 기업들이 전 세계 항만과 터미널의 자금 조달부터 건설·운영까지 장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급망 우려도 있다"고 했다. 실제로 중국 국영기업 상하이진화중공업(ZPMC)의 경우 현재 전 세계 화물 크레인의 70%를 공급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단순히 불공정 무역 행위에 그치지 않고 미국의 경제 전반을 위협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게 노조들의 우려다.

노조 단체들은 이번 청원에서 특히 안보 문제를 부각시켰다. 이들은 전 세계 화물 이동 및 배송 추적 데이터를 제공하는 중국의 물류정보 시스템인 로진크(LOGINK)를 대표 사례로 들었다. 그러면서 "미군 화물 90%가 상업용 선박으로 이동하는데, 중국은 로진크 같은 시스템을 통해 민감한 물류 데이터를 수집하고 중국 당국에 넘기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은 중국의 항만 시설 접근도 걱정하고 있다. 앞서 지난달 바이든 대통령은 크레인 등 중국산 항만 시설과 관련해 해안경비대에 미국의 해양 운송체계를 사이버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필요한 권한을 부여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ZPMC가 만든 미국 각지 항만 크레인들에 발주처가 요구하지도 않은 무선 모뎀 등 통신 장비가 창작돼 있고, 이 장비가 국가안보에 잠재적 위험 요소라는 미 의회의 조사 결과가 나온 뒤였다.

노조는 이번 청원으로 USTR에 "현재 미국 조선업체들의 시장 점유율이 세계에서 건조 되는 상업용 선박의 1%에도 못 미친다"며 "미국 항구에 정박하는 중국산 선박에 요금을 부과하고, 미국의 조선업을 지원하기 위한 기금을 조성해 달라"고 촉구했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노조의 이 같은 청원은 '수퍼 301조'로 불리는 무역법에 근거하고 있다. 해당 조항은 교역 상대국의 불공정한 무역 행위로 미국의 무역에 제약이 생기는 경우 광범위한 영역에서 보복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한 미국의 대표적인 보호무역 조치 수단이다. USTR은 청원을 접수하면 그 내용을 검토해 45일 내로 조사 개시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대선을 앞두고 바이든 정부가 조사 요청을 거절하지 않을 것으로 내다본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을 지낸 에반 메데이로스 조지타운대 교수는 "선거가 있는 해에 친노조 성향의 민주당 대통령에게 (조사 요청 수용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청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공화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맹공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전문가들은 "공화당 대선 후보인 트럼프 전 대통령 역시 중국과의 대대적인 무역 전쟁을 예고해 온 인물인 만큼 바이든 정부 역시 강경 목소리를 낼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실제로 바이든 대통령은 청원 접수가 있었던 이날 X(옛 트위터)에 "우리는 항상 중국의 불공정 관행에 맞서고 있다.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한 미국 노동자와 일자리를 보호하기 위해 싸울 것"이라며 중국 조선업체들의 불공정 관행 조사를 시사했다.

미 당국이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할 경우, 미·중 무역 갈등은 한층 고조될 수밖에 없다. FT는 "조선업이 미·중 무역전쟁의 새로운 전쟁터가 됐다"며 "양국 관계에 긴장이 커질 것"이라고 전했다.

조선업으로 번진 미·중 무역 전쟁은 한국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유엔 무역개발회의(UNCTAD) 집계에 따르면 한국의 세계 상업용 조선시장 점유율은 29.24%로 중국(46.59%)에 이어 2위다. 조선업에 대중 규제와 견제가 강화되면 한국이 반사이익을 누릴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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