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안혜리의 인생

춘천서 출퇴근만 4시간…75세 소아외과 의사, 병원 못 떠난 이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4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지난달 16일 박귀원 중앙대학교병원 소아외과 임상석좌교수와 만났다. 10년전 서울대병원에서 정년퇴임한 '한국 소아외과의 전설'인 박 교수는 "의사가 없다"는 호소에 은퇴를 번복했다. . 김경록 기자

지난달 16일 박귀원 중앙대학교병원 소아외과 임상석좌교수와 만났다. 10년전 서울대병원에서 정년퇴임한 '한국 소아외과의 전설'인 박 교수는 "의사가 없다"는 호소에 은퇴를 번복했다. . 김경록 기자

한국 '소아외과의 살아있는 전설'인 박귀원(75) 중앙대병원 소아외과 임상 석좌교수를 만난 날은 수련병원 전공의들의 집단사직 소식이 막 들려오던 지난달 16일이었다. 의사들은 "의료수가 조정 없는 정원 확대는 필수의료 대책이 될 수 없다"고 반발했지만, 정부는 증원 규모·시기는 협상 대상이 아니라고 못 박으면서 "집단행동 시 처벌하겠다"고 강경 대응에 나섰다. 결국 필수의료 전공의를 필두로 1만명 가까운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다.

편견을 실력으로 극복해온 삶
소아외과의 없어 은퇴 못 하지만
의사란 원래 '봉사'하는 직업
사회도 의사 소명감 꺾지 않길

박 교수는 서울대병원 1호 '여성' 외과 전문의이자 '소아외과' 전임의 1회 출신이다. 35년 넘는 서울대병원 재직 동안 무려 3만 건 넘는 경이적인 수술 기록을 남긴 그는 평생 학회 아닌 해외여행은 한 번도 못 갈 만큼 쉼 없이 달려왔고, 정년퇴임과 함께 은퇴를 마음먹었다. 하지만 "소아외과 의사가 없다"는 말에 정년퇴임 한 달 만에 중앙대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후임을 못 구해 10년째 병원을 지키고 있다. 필수의료의 산증인에게 의사의 인생에 대해 물었다. 안혜리 논설위원

인생의 결정적 장면, 하나
정년 한 달 만의 복귀

박귀원 중앙대학교병원 소아외과 임상석좌교수는 말 그대로 '전설'이다. 서울대병원 1호 여성 외과 전문의이기도 하고, 소아외과 1회 전임의 출신이기도 하다. 그를 지난달 16일 중앙대학교병원 연구실에서 만났다. 김경록 기자

박귀원 중앙대학교병원 소아외과 임상석좌교수는 말 그대로 '전설'이다. 서울대병원 1호 여성 외과 전문의이기도 하고, 소아외과 1회 전임의 출신이기도 하다. 그를 지난달 16일 중앙대학교병원 연구실에서 만났다. 김경록 기자

원치 않던 의대 입학, 여성을 아예 안 받던 외과 지원, 그 시절엔 개념도 생소했던 소아외과로의 방향 전환 등 인생의 모든 선택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2014년 3월, 정년퇴임 한 달 만의 현역 복귀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서울대병원 수술방에서 소아 마취를 해주던 대학 1년 선배이자 당시 중앙대병원 의료원장이던 김성덕 남양주 현대병원 의료원장이 "여기 소아외과 의사가 없으니 몇 년만 봉사해라"기에 그냥 "알았습니다" 하고 출근을 시작했다. 퇴직에 맞춰 집을 서울대병원 근처에서 춘천으로 옮겼기에 매일 기차·지하철을 갈아타며 출퇴근만 4시간 넘게 걸렸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선배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하기도 어려웠지만, 소아외과 의사가 얼마나 부족한지 잘 알았기에 순순히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그땐 이럴 줄 몰랐다. 내심 길어야 3년을 생각했다. 곧 춘천에서 의료봉사나 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 거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갈수록 소아외과 전문의가 줄다 보니 10년이 훌쩍 흘렀다. 탈장부터 고난도의 신생아 선천성 기형, 외상 수술 등이 가능한 대한소아외과학회 회원 수는 현재 50~60명, 고령이 많아 현장엔 20~30명만 있다. 어린이병원을 둔 서울대병원을 비롯해 대한민국 모든 병원에 소아외과 전임의가 단 한 명도 없을 정도다. 오는 5월 군 제대하는 의사 1명이 서울대병원에 들어올 예정이었는데, 최근 의·정 갈등 여파로 이마저도 불투명해졌다.

이유는 간단하다. 소아과·외과도 안 하려는 마당에 더 어려운 소아외과는 더더욱 기피하기 때문이다. 소아외과 전문의는 외과 전공의(레지던트)를 마치고 추가로 2년의 전임의(펠로)를 거쳐야 하기에 돈·시간을 더 투자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더 공부해 전문의를 따도 진로가 마땅치 않다. 수익에 도움이 안 된다며 대형병원조차 적정 수만큼 채용하지 않고, 저출산 여파로 개업도 쉽지 않아서다. 그 결과 2013년 52명이던 소아외과 전문의 지원자 수는 2018면 2명, 2021년엔 단 1명도 없었다. 박 교수는 "외과 전공의 시절엔 흥미를 보이다가도 다들 현실의 벽 앞에서 결국 포기하더라"고 했다.

가령 레지던트 하나는 "이제 결혼하니 돈 벌어야 한다"며 전임의 대신 개업을 택했고, "꼭 소아외과 하겠다"던 다른 레지던트도 "(개업이 가능한) 대장 항문 분야를 하겠다"고 도망갔다. 결국 2027년 2월 삼성서울병원에서 정년퇴직하는 교수가 후임으로 오기 전까진 만 78세에도 주 3회 외래에, 주 2회 수술을 박 교수 혼자 감당해야 한다. 비단 소아외과뿐 아니라 웬만한 필수의료는 이렇게 정년퇴직한 의사들 돌려막기로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

그땐 다들 했는데 지금은 왜 안 할까. 그래도 젊은 의사들 탓 못 한다. 오히려 이해한다. 박 교수가 1979년 소아외과에 발을 들였을 때만 해도 신생아 출생 수가 연 120만명이었는데, 지금은 20만명대다. 소아는 조직이 작고 연약한 데다 면역 등 모든 면에서 성인과 달라 난도가 훨씬 높은데도 수가는 예나 지금이나 원가 이하라 생명을 살리는 보람과 무관하게 병원에선 천덕꾸러기 신세로 눈칫밥을 먹어야 한다. 업무 강도는 센데 보상은 턱없이 부족하니 후배에게 차마 권할 수 없다. 수가나 과잉 의료 쇼핑 등 전반적 의료 시스템 정비 없이 전체 의사 수만 늘려선 소아외과(필수의료) 의사 확대로 이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이유다. "시스템을 바꾸려면 나라가 돈을 쓰고 국민을 설득해야 하는데 왜 무리수를 두는지…. "

인생의 결정적 장면, 둘
"여자는 안 된다"던 외과에 입성

정년퇴임 한달만에 중앙대병원으로 돌아온 박귀원 교수[사진 중앙대병원]

정년퇴임 한달만에 중앙대병원으로 돌아온 박귀원 교수[사진 중앙대병원]

의대를 졸업하던 1972년엔 과를 먼저 정한 후 인턴을 했다. 퇴근하면 지쳐 누워만 있던 산부인과 개원의 엄마를 봐서인지 산부인과는 싫었다. 환자 차도가 바로 안 보이는 내과도 성질에 안 맞았고, 외과가 딱이었다. 그런데 남 말할 것 없이 서울의대 외과 교수였던 아버지(박길수)부터 결사반대였다. "누가 여자한테 배 내놓고 수술하겠느냐"는, 그 시절 보수적인 여느 아버지다운 반응이었다. 아버지 강권에 못 이겨 원했던 법대 대신 세 언니와 똑같이 의대를 택했지만, 이번엔 물러서지 않았다. "수술 맡기겠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외과를 하겠다"고 버텼다.

"알아서 하라"는, 체념에 가까운 허락을 받은 후 위암의 세계적 권위자였던 고(故) 김진복 당시 의국장한테 승인 도장을 받으러 갔다. 외과 지원자 중 성적이 가장 우수한 편이었는데도 그는 2시간을 "하지 마라"고 설득했다. 통금이 있던 시절이라 수술이 늦게 끝나면 다들 야전 침대나 책상에 엎드려 잤는데, "여자는 그럴 수 없다"는 거였다. "당직 서겠다, 외과 하겠다"고 고집부리니 이번엔 "이화여대 병원에 가서 하라"고 했다. "서울의대 나와서 왜 이화여대 가느냐, 안 받아주면 미국 의사 면허 시험에 이미 합격했으니 미국 가겠다"고 맞섰다. 이렇게 설득 반, 협박 반으로 겨우 도장을 받았다.

여자라 당직실엔 못 들어갔지만 간호사실에서 쪽잠을 자면서도 기어이 똑같이 당직을 섰다. 일복은 넘쳤다. 당시 서울대병원에선 외과 전문의가 되려면 무의촌 진료 경력이 필요해 막 문을 연 춘천 도립병원에 근무한 적이 있는데, 술 먹어 위궤양 터지고 복막염으로 온 농부들이 많아 6개월 동안 수술을 참 많이 했다. 서울도 아니고 스무 살 넘은 처녀 보기 힘든 시골 동네였으니 25살 미혼 여의사를 곱게 봐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젊은 여의사한테 수술받는 게 겁 안 나냐"고 물으면 나이 든 농부들은 씩 웃으면서 "바느질은 여자가 다 하잖느냐"고 했다. 서울 최고 인재들보다 편견이 없었다.

그렇게 1977년 서울대병원 여성 외과 전문의 1호가 돼서 원자력병원에서 일했다. 마침 미국에서 막 돌아온 김우기 교수가 서울대병원에 생긴 소아외과로 부임했다. 그가 "어른을 수술하면 4~5년이지만 애들은 수십 년을 더 살릴 수 있다, 그만큼 보람이 있다"며 설득하는 통에 2주 동안 답을 피하다 결국 1979년 소아외과로 전공을 바꿨다.

인생의 결정적 장면, 셋
아버지의 죽음, 구본무의 지혜

생전 구본무 LG 회장이 인재 확보 차원에서 대학생 초청 행사를 하는 모습. 구 회장의 봉사하는 삶에 대한 얘기가 박귀원 교수 삶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중앙포토]

생전 구본무 LG 회장이 인재 확보 차원에서 대학생 초청 행사를 하는 모습. 구 회장의 봉사하는 삶에 대한 얘기가 박귀원 교수 삶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중앙포토]

아버지는 박 교수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지난 2001년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져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실려 왔다. 상태를 본 신경외과 교수가 결과가 안 좋을 거라며 "안 하겠다"는 걸 억지로 우겨서 수술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후 8~9개월 동안 끝내 단 한 번도 의식을 못 차리고 돌아가셨다. 의료비, 가족의 고생, 무엇보다 아버지 당신의 불필요한 고통. 후회했다. "의료라는 명목으로 아버지한테 못 할 짓 한 게 아닌가. "

현역 시절엔 머릿속이 오로지 아이들 살릴 생각으로 가득 차서인지 아버지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막상 정년이 다가오니 덜컥 겁이 났다. 미혼이라 고독사가 제일 무서웠고, 그다음으론 언니든 조카든 본인 의지와 무관하게 불필요한 연명 치료를 선택해 결국 아버지 같은 마지막을 맞이할까 두려웠다. 평소 알던 비구니 스님이 머무는 춘천 감주사에 내려간 이유다. 그리고 맘 속에 품기만 하다 3년 전쯤 연명의료결정서도 작성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지만 죽음을 이렇게 허망하게 의사 손에 맡기고 싶진 않았다.

반려견 효리와 함께 춘천 감주사 근처 산책에 나선 박귀원 교수. [사진 박귀원]

반려견 효리와 함께 춘천 감주사 근처 산책에 나선 박귀원 교수. [사진 박귀원]

그에게 대체 의사란 무엇일까. 박 교수는 이 질문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봉사"라고 답하면서, 고 구본무 LG 회장이 생전 로터리 클럽 강연에서 했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사과 10개 중에 3개를 애들 셋한테 하나씩 나눠줘서 먹게 하고는 "몇 개 남았느냐"고 물었더니 한 놈이 "7개"라고 답하지 않고 "3개 남았다"고 하더란다. "먹는 게 남는 거"라면서. "구 회장님 말씀이, 죽어서 한 푼도 못 가져가는데 돈이 아무리 많으면 뭐하냐, 죽을 때 내 돈은 내가 가진 돈이 아니라 내가 여태까지 남을 돕느라 쓴 돈이라는 거예요. "

어디 돈뿐일까. 의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살릴 수 있는 의술을 갖고 있으면 뭐하나, 실제로 살려야 의술이지. 그리고 박 교수는 "여전히 전성기"라는 그의 일생을 통해 실제로 이런 봉사하는 삶을 보여줬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남을 위해 봉사한다는 생각이 없으면 하기 힘든 게 의사에요. 그런데 최근 다들 의사를 욕하니. 우리 때 산부인과 레지던트 하나가 3일 휴가 가보겠다고 3일 연속 연장 근무한 끝에 강원도 해변에서 심장마비로 죽기도 했어요. 지금은 그렇게까진 아니어도 고생은 여전한데, 중환자실 들어가면 무조건 살아나온다고 생각하니까 의사에 대한 불신이 더 커지는 거 같아요. 지금 갈등의 해법을 좀 찾았으면 좋겠어요. " 완곡한 바람이었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