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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은미의 마음 읽기

기억을 나눈다는 것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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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최은미 소설가

최은미 소설가

사랑하는 여인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현장 재현을 기획하는 한 남자가 있다. 여자와 남자는 몇해 전 전쟁터에서 헤어졌다. 당시 중령이었던 남자는 여자를 피신시키기 위해 도하 작전 중이던 강가에서 여자와 여자의 남편을 배에 태워 보낸다. 하지만 여자의 남편은 여자의 눈앞에서 죽고 여자는 2년 동안 군대에 끌려다니며 여성의 몸으로 폭력을 겪게 된다.

남자와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 여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반 짐승처럼 사는 ‘미친’ 상태였다. 남자는 슬픔에 빠진다. 그녀는 남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자를 사랑에 빠지게 했던 ‘여자’로서의 모습 또한 모두 잃은 채 광기와 야생의 상태에서 말을 잃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어떻게든 여자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그들이 헤어졌던, 그 끔찍한 전투가 벌어졌던 강가를 여자의 눈앞에 그대로 재현하기로 마음먹는다.

과거 사건 그대로 재현 가능할까
기억, 갑자기 도래하는 거라면
매개하는 사건은 철저한 현재형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남자는 일꾼들을 불러모아 강을 연상시키는 운하를 파고 수백명의 농부를 고용해 군복을 입힌다. ‘그는 그렇게 그 모든 장면을 최대한 참혹하게 재현하기 위해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았고’ 몇 개월의 준비 끝에 여자를 그 현장 속으로 데려온다. 여자는 남자가 기획한 그 생생한 스펙터클 속에서 마침내 기억이 살아나 사랑했던 사람을 알아보지만, 기억이 엄습한 동시에 죽고 만다.

이것은 발자크가 1830년에 발표한 중편소설 『아듀』의 내용이다. 이 소설에서 발자크는 남성 인물 필립의 절절한 슬픔과 사랑이 사실은 상대가 아니라 자신에게 초점이 맞춰진 것임을 곳곳에서 드러낸다. 사건을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대상을 앞선 순간 그 욕망은 망각 속에서만 생존할 수 있었던 자를 드디어 죽게 만든 것이다.

이 소설에서 발자크가 재현의 가능성에 대해 던지는 깊은 회의는 200년 후인 지금의 창작자와 서사 소비자 모두에게 여전히 유효하고도 중요한 질문을 남긴다. 과거의 사건이나 누군가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게 가능하다는 환상이, 매끈하게 서사화해 소화하고자 하는 욕망이 정작 누락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언어로 온전히 표현될 수 없고 말해지는 순간 그 핵심이 흩어지는 사건에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다가설 수 있는가.

이 소설은 또한 기억의 속성에 대한 메타포로 읽히기도 한다. 기억은 내가 주체가 되어 불러낼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시에 나를 엄습해오는 것일까. 오카 마리는 『기억 서사』에서 프루스트의 마들렌 체험과도 유사하게 불시에 시간을 건너 떠오른 서양배의 감각을 얘기하며 사람이 무언가를 떠올린다고 할 때 그것은 사람이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사람에게 도래하는 것임을, 그것이 바로 기억의 속성임을 말한다.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기억이 갑자기 도래할 때 기억은 나의 통제를 벗어나 내 신체를 습격해오며 그럴 때 기억이 매개하는 사건은 더 이상 과거의 영역이 아닌 철저한 현재형이 된다. 항상 현재형으로 회귀하는 사건은 시제가 파괴되어 있으며 거기에 기억의 근원적인 폭력성이 있다고 오카 마리는 말한다.

『아듀』의 여성 인물 스테파니처럼 철저한 망각 속에 자신을 놓아두지 않는 이상 사건을 겪은 이들은 여전히 2년 전을, 10년 전을, 70년 전을 현재형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테파니의 기억에 조금도 접근할 수 없는 것일까. 스테파니가 경험한 폭력을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알 수 있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역사와 기억과 재현을 주제로 커리큘럼을 짠 수업 개강을 앞두고 나는 오카 마리의 한 문장을 학생들과 같이 읽으며 학기를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에 그 챕터를 복사해 강의실로 갔다. 이십여년 전 번역됐다 아주 오래 절판 상태였던 발자크의 『아듀』가 올해 3월이 되기 직전에 새로 번역돼 출간되었단 소식을 전하면서 이건 거의 우리 수업을 위한 출간이 아닐까요? 같은 실없는 말을 했던 것도 같다.

오카 마리의 『기억 서사』 또한 오랫동안 절판 상태였는데 올해 3월 중에 재출간이 된다는 소식이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두 책이 다시 출간된다는 건 두 책이 담고 있는 문제의식이 2024년 지금 이곳에서 여전히 현재형이라는 걸 반증하는 일일 것이다. 시제가 엉킨 사건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기억에 참여한다는 것, 그 가능성을 숙고하는 오카 마리의 문장을 더 여러 사람들과 나눌 수 있게 돼서 좋다.

‘폭력적인 사건,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는 점에 그 사건의 폭력성의 핵심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바로 그와 같은 ‘사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 ‘사건’의 기억을 타자와 나누어 가질 수 있겠는가.’

최은미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