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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의 발표 안된 시 166편 공개…“아버지가 뭐하러 했노 하실까 겁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박목월 시인의 육필 시 노트를 들어 보이는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 [연합뉴스]

박목월 시인의 육필 시 노트를 들어 보이는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 [연합뉴스]

“아버님께서 하늘에서 ‘뭐하러 했노?’ 그러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겁도 납니다.”

‘나그네’ ‘청노루’ 등의 대표작을 남긴 박목월 시인(1915~78·사진)의 장남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85)는 부친이 남긴 미발표 시 166편을 공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국문학자인 박 교수는 부친이 남긴 노트 80권에 담긴 미발표 작품을 후배 학자들과 함께 추려 이날 공개했다. 박목월 시인 타계 46년 만이다.

박목월유작품발간위원회는 1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 교수가 자택에 소장한 노트 62권과 경주 동리목월문학관에 보관된 18권의 노트에 담긴 미발표 시 290편 중 완성도가 높고 주제 의식이 기존과 다른 166편을 추려 공개했다.

발굴 작업은 박 교수의 제자인 우정권 단국대 교수의 궁금증에서 시작됐다. 우 교수는 “박 교수님 댁 한구석의 보자기에 싸인 노트에 대한 의문이 영원한 숙제처럼 남아 있었다. 지난해 4월 선생님께 보여 달라고 청했다”며 “미발표작임을 알고 그해 8월 동료 학자들과 발간위원회를 꾸려 6개월간 기존 출간작과 대조하고 분석했다”고 설명했다.

박 시인의 시들이 적힌 노트. [뉴스1]

박 시인의 시들이 적힌 노트. [뉴스1]

부친 사후 46년 만에 작품을 공개한 이유에 대해 박 교수는 “아버지가 발표를 원치 않은 작품도 있을 텐데 시인 전반의 생애를 보는 데 이 자료가 필요해 보이고, 학자들에게 평가받아 보자는 생각으로 공개하게 됐다”고 했다. 우 교수 외에 방민호 서울대 교수, 유성호 한양대 교수 등이 발간위에 참여했다.

박 교수는 “창작 노트들이 잘 보관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어머니 덕”이라며 “시인의 아내로서 이 노트들을 잘 보관해야겠다는 일념이셨다. 부친이 작고하신 뒤에도 20년 동안 장롱 밑에 잘 넣어두셨다”고 말했다. 고(故) 유익순 여사는 경주, 대구, 서울로 이사를 다니고 한국전쟁 때 피란을 겪으면서도 시인의 노트를 보따리에 싸매고 다녔다.

박목월 시인

박목월 시인

미발표 시는 시인이 등단한 1930년대에서 타계한 1970년대 사이 쓰인 것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총망라한다. 1950년대의 제주를 소재로 한 시들, 1960년대 사람들의 일상적 삶을 노래한 작품, 역사적 격동기였던 해방과 한국전쟁 등에 대해 작고 직전까지 쓴 시편들이 포함됐다. 그 밖에도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거나 가족에 대한 사랑, 가장으로서 겪는 어려움을 노래한 시들이 두루 공개됐다.

우 교수는 “박목월 시인은 자연에 대한 목가적이고 서정적인 시를 써온 것으로 알려졌지만 새로 발굴된 작품 속에는 그간 찾아보기 어려웠던 한국전쟁의 참혹함이나 해방의 기쁨 등 시대상을 담은 작품, 현실 감각을 드러낸 작품이 많다”고 설명했다.

구두닦이 소년의 모습을 그린 ‘슈샨 보오이’가 대표적이다. ‘6·25때/엄마 아빠가 다 돌아가신/슈샨보이./길모퉁이의 구두를 닦는 슈샨·보이.//(중략) 이밤에 어디서 자나 슈샨·보이/비가 오는데, 잠자리나 마련 했을가. 슈샨·보이/누구가 학교를 보내주는 분이 없을가. 슈샨·보이/아아 눈이 동그랗게 아름다운 그애 슈샨 보이/학교 길에 내일도 만날가 그애 슈샨보이.’

유성호 한양대 교수는 어눌하게 살아가는 시인 자신과 용설란을 동일시하며 타향살이의 쓸쓸함을 제시한 작품 ‘용설란’을 걸작으로 꼽았다. ‘파도소리에 뜰이 흔들리는/그 뜰에 용설란//반쯤 달빛에 풀리고/반쯤 달빛에 빛나는 육중한 잎새//(중략) 어눌한 사투리로 가까스로 몸매를/빚어,//안개에 반쯤 풀리고/안개에 반쯤 살아나는 용설란.’

발간위는 이번에 공개한 작품을 활용해 전집과 평전을 내고 시낭송회와 뮤지컬화 등을 추진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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