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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프리즘] 1등을 1등이라 부르지 말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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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0호 30면

정영재 문화스포츠에디터

정영재 문화스포츠에디터

가끔 원로 체육인 댁을 방문하면 빛바랜 메달과 트로피, 상장 등을 전시해 놓은 걸 볼 수 있다. 반짝이던 금메달은 시커멓게 변색돼 있고, 상장도 곰팡이가 슬어 보기 안쓰러울 때도 있지만 이분들은 ‘옛 영화’의 상징을 애지중지 아낀다.

나도 학생 시절에 ‘백일장’이라 불리는 글짓기대회만큼은 휩쓸고 다녔다. 그때 받은 상장들을 아흔이 넘은 부친은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계신다. 이처럼 상은 자신감과 성취감을 주고, 세월이 지나서도 은은한 추억을 소환하는 매개체가 된다. 그래서 상은 많을수록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

축구협회 초등대회 순위·시상 없애
‘즐기는 축구’ ‘동기부여’ 사이 숙고를

그런데 상을 주기는커녕 ‘1등을 1등이라 부르지 말라’는 곳이 있다. 대한축구협회가 주관하는 초등부 대회다. 초등부는 조별예선을 거쳐 각 조 1위는 1위끼리, 2위는 2위끼리 다시 리그전을 펼친다. 월드컵을 포함한 대부분의 대회가 조별예선에서 올라온 팀끼리 토너먼트로 대결해 우승 팀을 가리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다. 조 1위끼리 모인 리그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팀이 사실상 우승이지만 시상식도, 트로피도, 상장도 없다. 그러니 피 말리는 승부도, 우승의 환희도, 준우승의 아쉬움도 없다. 득점왕이나 MVP 같은 개인상도 없다. 마지막 경기가 끝나면 선수들은 조용히 짐을 싸서 대회장을 떠난다.

축구협회는 ‘즐기는 축구’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순위를 가리고 시상을 하면 승부에 집착해서 즐기는 축구를 할 수 없다는 거다. 특정 선수를 혹사하는 것도, 심판에게 과도하게 항의하는 것도, 창의적이고 과감한 플레이를 못 하게 하는 것도, 모두 ‘순위와 시상’에 목 매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김진항 축구협회 대회운영본부장은 “축구 선진국에서는 초등부 시상을 거의 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기량을 펼쳐 보이며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만으로도 대회 목적을 이미 달성했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반면, 현장 지도자들은 불만을 터뜨린다. 모든 스포츠에는 ‘경쟁’이라는 요소가 있고, 남보다 더 열심히 운동해서 좋은 성적을 거뒀으면 칭찬하고 상을 줘야 마땅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가위바위보를 해도 이기고 싶은 게 사람의 본성일진대, 잘해도 상을 주지 않으면 어떻게 동기부여를 할 수 있을지 답답하다고 한다.

서울 신정초 축구부(신정FC로 바뀜)에서 전국대회 100회 이상 우승하고, 조현우·문선민·홍현석 등 국가대표를 다수 키워낸 함상헌 감독은 “축구를 취미로 즐기는 아이가 있고, 선수의 꿈을 품고 정진하는 아이도 있다. 일방적인 시상 폐지는 이런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단견이다”고 소신을 밝혔다. 그는 초등부 경기 심판을 2명에서 1명으로 줄인 것도 지적했다. “협회는 경기 수를 늘리기 위한 고육책이라고 하는데, 현장에서는 숱한 오심으로 인해 분위기가 엉망이다. 심판의 명백한 오심으로 골을 먹고 경기에 지는데 어떻게 ‘즐기는 축구’를 할 수 있겠나.”

김종윤 축구협회 대회운영팀장은 “아이들은 트로피가 없어도 행복하게 축구 할 수 있다. 인구 1000만인 벨기에가 FIFA 랭킹 1위까지 갈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시스템 덕분이다. 어른들이 욕심을 조금만 내려놓아도 ‘즐기는 축구’는 뿌리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어느 쪽이 옳을까. 보기 나름이고, 입장에 따라 편이 갈릴 것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라며 탄식하는 건 홍길동 한 명이면 충분하다. 1등을 1등이라 불러주고, 마음껏 축하해 주면서도 경기가 과열되지 않고 심판이 존중받는 대회. 아이들이 축구를 즐기면서도 뛰어난 선수로 성장하는 환경. 이것이 우리 어른들이 마음을 모으고 머리를 맞대 설계해야 할 모델이 아닐까. 축구협회가 “1년에 한두 대회는 시상을 하는 쪽으로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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