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0만원 소아암 약' 둘 곳은 김치냉장고뿐…그 엄마의 사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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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제가 있지만, 한국엔 없습니다.”
소아암 환자의 엄마 김모씨는 5년 전 막막했던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당시 세살짜리 둘째 아이는 열이 안 떨어지고 복통이 반복되는 증상을 보였다. 대형병원 응급실에 갔다가 받게 된 진단은 ‘신경모세포종’. 신경세포가 악성 종양(암)이 되는 병이었다. 소아암 절반을 차지하는 고형암(장기에 생긴 암) 중에서 뇌종양 다음으로 많은 암이라는 설명과 함께 이어진 주치의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해외에 치료제(제품명 콰르지바)가 있지만, 국내엔 아직 도입이 안 돼 대부분의 환자가 독한 1세대 항암제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를 살리겠다”는 엄마의 ‘약 찾아 삼만리’ 분투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해외 제약사에 “약을 받고 싶다”는 E메일을 보냈지만, 한국엔 출시 계획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주치의 도움을 받아 우여곡절 끝에 길을 찾았다. 식품의약품안전처 산하 한국희귀·필수의약품센터를 거쳐 약을 주문할 수 있었다. 가격은 1바이알(주사용 유리 용기 단위)에 1700만원. 2바이알을 3400만원에 샀다.

지난해 11월 서울대병원 의생명연구원에서 열린 소아암·희귀질환 극복을 위한 '함께 희망을 열다. 미래를 열다' 심포지엄에서 '희망정원'이란 꽃 도안 전시회에 환아와 가족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서울대병원

지난해 11월 서울대병원 의생명연구원에서 열린 소아암·희귀질환 극복을 위한 '함께 희망을 열다. 미래를 열다' 심포지엄에서 '희망정원'이란 꽃 도안 전시회에 환아와 가족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서울대병원

넘어야 할 산이 더 있었다. 김씨는 “약값뿐 아니라 관세·부가세·운송료 등 모든 비용을 부담해야 했고 보관 책임도 환자에게 있었다”고 회고했다. 고가 약제라 센터에 도착한 약을 바로 수령해 와야 했다. 2~8도로 냉장 보관이 필요했다. 김씨는 “아픈 아이를 데리고 아이스박스와 온도계를 챙겨 가서 약을 받아왔다”고 말했다.

병원 입원까지 집에서 약과 함께 기다려야 했다. 김치냉장고 한쪽을 비워 적정 온도를 벗어나면 알림이 울리는 온도계를 설치했다. 입원하기로 한 날, 애지중지 보관한 약을 병원에 전달하고서야 가슴 졸이던 여정이 끝났다. 아이는 호전됐다.

진단도, 치료도 어려운 소아암은 약을 구하기도 힘들다. 특히 희귀한 고형암은 원인 유전자 변이를 찾는 것도 어려운데 약을 찾는 데도 걸림돌이 많다. 해외에선 쓰이지만 국내 유통되지 않거나, 성인에게 허가가 됐으나 소아에겐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암을 유발한 변이를 찾고 이를 타깃으로 한 면역·표적 치료제 등을 써서 완치율을 끌어올려 가는 성인암과 사정이 많이 다르다.

이지원 삼성서울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기존 약으로 치료하다가 재발한 경우 외국 환자는 신약 임상 시험에 참여할 기회가 많지만, 국내 환자는 접근성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치료 후에 수십 년을 사는 소아암 환자에게 효과는 좋고 독성은 낮은 약들이 필요하지만, 환자가 워낙 적어서 이윤을 따져야 하는 제약사로서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문제도 있다.

지난달 2일 오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소아고형암 정밀의료사업 '스트림' 프로그램 관련 심포지엄이 진행되고 있다. 피지훈 교수가 세션1에서 발언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지난달 2일 오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소아고형암 정밀의료사업 '스트림' 프로그램 관련 심포지엄이 진행되고 있다. 피지훈 교수가 세션1에서 발언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김씨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대부분의 환자는 엄두를 내지 못해 의료진이 돕기도 한다. 고경남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뇌종양 중에서도 고약하다는 선천성 교모세포종이 재발한 한 살짜리 환자를 위해 제약사의 ‘동정적 사용 프로그램’(임상시험 단계 신약을 위독한 환자에게 인도주의 차원으로 지원하는 것)을 통해 해외 치료제를 들여온 적이 있다”고 말했다. 아기 환자는 그 약을 써서 치료됐다. 고 교수는 “약을 쓸 만한 근거가 있는지, 어떻게 쓸 계획인지 등에 대해 식약처 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관련 행정 절차가 복잡해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가능한 일”이라며 “아주 예외적으로 유효 기간이 얼마 안 남은 약을 무상으로 받기도 한다”라고 설명했다. 고 교수는 “약이 공항에서 퀵 서비스로 도착하면 외래 진료를 보다가 받으러 나가기도 한다. 일종의 ‘회색지대’ 영역이라 약제부에 약을 보관할 수 없고 사무실과 연구실, 병동 냉장고에 뒀다가 환자에 쓴다”고 덧붙였다.

지난달 2일 오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열린 소아고형암 정밀의료사업 스트림 프로그램 관련 심포지엄에서 피지훈 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지난달 2일 오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열린 소아고형암 정밀의료사업 스트림 프로그램 관련 심포지엄에서 피지훈 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이처럼 약을 구하기 어려운 소아암 환자에게 최적의 치료약을 매칭해주기 위한 노력이 의료계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2021년 5월 기부한 3000억원의 기부금이 만들어낸 반전이다. 서울대병원이 주축이 된 이건희 프로젝트팀은 전국 의료진과 함께 모든 소아암 환자가 최첨단 기술(전장 유전체 염기서열 분석)과 의료진의 집단지성(분자종양보드)을 통해 정확한 진단을 받을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한 데 이어, 2차 목표로 최적의 치료 약을 직접 연결해주는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환자와 가족, 의료진의 고군분투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진단부터 치료까지 물 흐르듯 끊김 없이 지원하는 ‘스트림(STREAM·소아고형암 정밀의료 사업)’ 프로그램이다.

사업을 총괄하는 피지훈 서울대병원 소아신경외과 교수는 “지금까지는 환자들 전부에게 아스피린을 처방했다면, 이제는 정확한 진단을 한 뒤 ‘당신은 아스피린, 당신은 타이레놀’ 이런 식의 맞춤형 치료를 권유하고 타이레놀이 없으면 구하기까지 도움을 주는 플랫폼으로 확장해가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피 교수는 “(허가 관련 기관인) 식약처와 제약사, 의료진 등이 십시일반 하면 치료 약 접근성을 높여 치료율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존 치료법이 잘 안 듣는 재발 환자를 대상으로 소아에게는 못 쓰는 약, 국내에서 못 쓰는 약, 임상 단계의 신약 등 순으로 환자 접근 기회를 넓혀 간다는 것이다. 고경남 교수는 “예전에는 옵션이 아예 없던 환자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기회를 주는 것”이라며 “환자마다 치료율을 0%에서 100%로, 30%에서 50%로 올릴 수 있는 굉장한 일”이라고 했다.

지난해 11월 서울대병원 의생명연구원에서 열린 소아암·희귀질환 극복을 위한 '함께 희망을 열다. 미래를 열다' 심포지엄에서 '희망정원'이란 꽃 도안 전시회에 환아와 가족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서울대병원

지난해 11월 서울대병원 의생명연구원에서 열린 소아암·희귀질환 극복을 위한 '함께 희망을 열다. 미래를 열다' 심포지엄에서 '희망정원'이란 꽃 도안 전시회에 환아와 가족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서울대병원

피 교수는 “궁극적으로는 종양에 상관없이 약이 들을 수 있다는 바이오마커(생체표지자)가 확인되면 이건희 기부금으로 비용(약값 등)을 대고 제약사가 잘 설계된 임상시험을 론칭해 환자들에게 약을 공급하도록 해 치료 기회를 늘리는 게 목표”라고 설명했다. 추천 약이 나오면 제약사를 통해 1대1 임상시험을 진행하는 독일의 ‘인폼(INFORM)’ 프로그램과도 연계해 해외 임상에 참여할 기회도 확대할 계획이다.

피 교수는 이지원 교수 등과 지난해 말부터 두 달여간 제약사와 한국바이오협회 등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이런 필요성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고 한다. 그 결과 지난달 2일 정부와 제약사 관계자들이 참석한 심포지엄을 열었다. 소아 고형암 정밀의료를 공론화하는 첫발을 뗀 것이다. 피 교수는 “기부금이 없었다면 절대 할 수 없었을 일”이라며 “여러 바이오벤처, 제약기업과 협업하며 모든 암을 포괄해 진단과 치료 역량을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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