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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나는 아들이 없습니다…” 다산 뒤흔든 형수의 눈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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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예법에 맞선 정약용 집안 여인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아주버니여, 나를 살려주시오. 아주버니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오. 나를 돕지는 못할망정 어찌 차마 나에게 그러십니까. 자산(玆山)은 아들이 있으나 나는 아들이 없습니다. 나야 비록 아들이 있다손 치더라도 청상과부인 며느리는 아들이 없으니, 청상의 애절한 슬픔에 예가 무슨 소용이겠소. 예에는 없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데려오겠소.”(叔兮活我. 叔兮矜我.  雖不助我,  胡寧忍我. 玆山有子, 我則無子. 我雖有子, 孀婦無子. 情之絶悲, 禮於何有. 禮雖亡矣, 我則取之.)

형수의 편지를 받은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은 “천 마디 만 마디 말이 원망하는 듯 간절한 듯 우는 듯 호소하는 듯하여 읽자니 눈물이 흘러내려 답변할 말이 없었다”라고 썼다. 다산의 유배지 강진으로 편지를 보낸 이는 자산(玆山) 정약전(1758~1816)의 부인 풍산 김씨다. 무슨 일일까.

형 약전 외아들 17세에 요절하자
형수 김씨 집안 조카 후사로 낙점

“예에 매우 어긋나” 다산 반대하자
강력한 항변 편지 보내 돌려세워

다산 아내도 “인정 살펴야” 가세
남편들 놀라게 한 아내들의 경고

귀양길 약전에게 외국 구슬 바친 효자

정약용의 둘째 형 정약전과 그의 아내 풍산 김씨가 합장돼 있는 부부 묘. 경기도 광주시 천진암로 한국천주교회창립선조 가족 묘역 안에 있다. [사진 이숙인]

정약용의 둘째 형 정약전과 그의 아내 풍산 김씨가 합장돼 있는 부부 묘. 경기도 광주시 천진암로 한국천주교회창립선조 가족 묘역 안에 있다. [사진 이숙인]

편지가 오간 1811년 당시,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유배 10년의 삶을 버텨내고 있었다. 신유사옥(1801)으로 귀양길에 오를 때, 땋은 머리의 외아들 학초가 화성의 남쪽 유천(柳川)에서 전송했는데, 그때 나이 11세였다. 학초(學樵)는 집에 있던 외국산 사안주(蛇眼珠, 뱀 눈동자 모양의 구슬)를 들고나와 아버지께 바치길 “흑산도엔 뱀이 많다 하니 이 구슬로 보호하소서”라고 했다. 구슬은 비추면 뱀이나 독사 따위가 얼씬도 하지 않는 기이한 보배였다. 자산은 아들의 구슬을 받아 주머니에 넣으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자산의 아들 학초는 경전(經傳) 공부를 좋아하며 학문에 천재성을 보여 숙부 다산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다산은 학문 성향이 약간 다른 두 아들보다 조카 학초가 자신을 이을 것으로 보고, 유배지에서 저술한 사서 육경에 관한 학설 240권을 그에게 전하고자 했다. 학초는 당대 최고의 학자 다산의 원격 지도로 학문적 골격을 갖춰가면서 관례(冠禮, 성인식)를 치르고 장가를 들었다. 그리고 1년 계획으로 강진에서 스승의 지도를 받고 흑산도로 건너가 아버지 곁에 머물다 오기로 한다. 강진과 흑산도는 학초의 방문을 손꼽아 기다리며 행복한 나날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당도한 것은 학초가 아니라 학초의 부고였다. 남녘으로의 원행을 꾸리던 와중에 병을 얻어 요절하고 만 것이다. 그때 나이 17세였다. 정학초(1791~1807)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긴 흑산도와 강진은 물론 마재(경기도 남양주시 능내리)에서 함께 살던 어머니 김씨와 갓 시집온 신부 윤씨의 비통한 처지는 필설로는 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약용 표준 영정. 1974년 한국은행이 월전 장우성 화백에게 의뢰해 제작했다. [중앙포토]

정약용 표준 영정. 1974년 한국은행이 월전 장우성 화백에게 의뢰해 제작했다. [중앙포토]

학초가 죽고 3, 4년의 세월이 흘렀다. 자산의 부인 김씨는 집안 조카 학기(學箕)의 아들을 학초의 후사로 삼고 싶어한다. 학기도 자산과 다산의 뜻이라면 자신의 아들을 바치겠다고 한다. 총명하고 준수하게 생긴 집안 조카가 사촌 동생 학초의 후사가 되는 것이 기뻤던 다산의 두 아들은 즉시 아버지께 알리어 어른들의 뜻을 기다린다. 그런데 다산은 “일로 보아서는 매우 좋으나 예(禮)로 보아서는 매우 어긋난다. 예를 어길 수는 없다”고 한다. 두 아들은 “예의 뜻이 그러하다면 없는 일로 하겠습니다”라고 한다.

그사이 다산은 흑산도의 형에게 편지를 보내 고례(古禮)에 입각한 입후(立後, 양자를 들임)의 원칙을 설파한다. 아버지가 계시는데 큰아들이 후사(後嗣) 없이 죽으면 (죽은 아들의) 후사를 세우지 않고 (아버지의) 차자(次子)를 세우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아들이 후사가 없다면 후사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다산은 향리 마재에서 논의된 학초의 후사 건을 승인하지 말라는 뜻을 은근히 전달한다. “소원한 일가의 아들을 취하기보다 형의 서자 학소(學蘇)가 훗날 아들을 낳으면 그를 학초의 후사로 삼는 것이 고금의 예에 부합할 듯합니다.”(‘중형(仲兄, 둘째 형)께 올림’)

놀란 다산 “그냥 누워 있겠습니다”

강진 유배 시절 정약용이 아내가 보내온 붉은색 비단 치마를 잘라 두 아들에게 썼던 편지를 묶어 만든 ‘하피첩’. 선비의 마음가짐, 베푸는 삶의 가치 등을 전하는 내용이다. 보물 제 1683-2호.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강진 유배 시절 정약용이 아내가 보내온 붉은색 비단 치마를 잘라 두 아들에게 썼던 편지를 묶어 만든 ‘하피첩’. 선비의 마음가짐, 베푸는 삶의 가치 등을 전하는 내용이다. 보물 제 1683-2호.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이쯤에서 앞서 보았던 자산의 부인 김씨의 분노 섞인 항변을 짐작할 수 있다. 자산은 유배지 흑산도에서 소실을 두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에서 배우 이정은이 맡은 가거댁이 바로 그녀다. 자산은 이 여성으로부터 두 아들 학소와 학매(學枚)를 얻었다. 학초의 양자 논의가 오갈 무렵 흑산도의 아이들은 7살과 4살이었다. 자산에게는 학초나 학소, 학매가 같은 아들이지만 부인 김씨는 그렇지 않다. 그녀의 유일한 아들 학초가 죽고 없으니 “자산은 아들이 있으나 나는 아들이 없다”고 한 것이다. 부인 김씨는 시동생 다산에게 따지듯 호소하듯 우리(자신과 며느리)를 살리고 싶거든 예(禮) 따위 집어치우고 인정을 따르라는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

놀란 다산은 곧바로 형수 앞으로 편지를 넣는다. “예에는 비록 어긋난다 하더라도 일로 보면 매우 좋습니다. 저는 차마 저지하지 못하겠으니 그냥 누워 있겠습니다. 자산(玆山)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의논해 보십시오.” 앞서 다산이 두 아들에게 ‘예를 어길 순 없다’고 한 단호함은 온데간데없다. 이어서 다산의 아내 홍혜완이 동서 김씨의 편을 들며 지원사격을 해온다. “다시는 예를 말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인정을 살피십시오. 만약 다시 (양자를) 막는다면 시어머니와 며느리 두 사람이 한 노끈에 같이 목을 맬 것입니다(姑婦二人, 一繩雙縊).”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다산은 흑산도의 자산에게 급히 소식을 띄우는데, 스스로는 발을 빼는 형상이다. “저는 이 일에서 감히 흑백을 논하지 못하겠습니다. 급히 편지 두 통을 써서 하나는 제 큰아이에게, 하나는 형수께 보내 마무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떤 식의 결론인지 직접 언급은 없지만 이어지는 내용에서 다산의 뜻을 짐작할 수 있다. “예는 그러하지만 지금의 사태가 어찌할 수 없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고경(古經)만을 굳게 지켜 화기(和氣)를 잃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어서 다산은 우리나라 양자법(養子法)의 장점을 죽 늘어놓는데, 형수 김씨를 지지하는 쪽으로 선회를 한 것이다.

요절 외아들 후사 이었는지 불분명

정약전이 유배 가 있던 조선시대 나주목 흑산도 지도.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정약전이 유배 가 있던 조선시대 나주목 흑산도 지도.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학초의 양자 문제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궁금하다. 다만 나주 정씨 족보에 의하면 학초는 후사가 끊긴 것으로 나오고, 흑산도의 학소는 학무(學武)로 개명하여 아버지의 후손을 잇고 있다. 또 학매는 학승(學乘)으로 개명하여 서숙부 정약횡(1785~1825)의 후사가 되었다. 족보상으로는 부인 김씨가 패(敗)하여 학초의 입후(立後)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다산의 가족사만 보더라도 갓난이가 자라서 어린이가 되고 청년으로 성장하여 성인이 되기란 행운에 기댈 정도이니 학초의 입후 여부를 족보상으로 속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산과 자산, 형제는 같은 날 함께 유배길에 올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는 곳에서 편지로 안부를 나누며 조선 시대 학술의 최고봉을 이룬 사람들이다. 각자 새로운 작품이 나올 때마다 보내온 초고를 읽어주고 평가하고 격려하면서, 서로의 존재 의미가 되었다. 특히 형 자산은 아우 다산의 경전 해석을 ‘동쪽 하늘의 떠오르는 샛별’이나 ‘중천의 밝은 태양’에 비유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정약전도 섬에서 많은 저술을 내는데, 널리 알려진 것으로 해양생물을 과학적으로 분류하고 해석한 『자산어보』 두 권이 있다. 자산은 유배 16년 만에 귀양지에서 최후를 맞지만 “동복(同腹)이면서 지기(知己)”를 잃은 다산은 그 2년 후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고향에서 어린 가족을 돌보며 생업을 꾸려가는 아내들의 시간은 어떠했을까. 자산의 부인 김씨나 다산의 부인 홍씨가 남편들을 비판한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모를 예(禮)에 붙들려 사람의 마음을 함부로 무시한다는 점이었다. 즉 책과 지식으로 사람살이를 재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귀양지의 남편이 소실을 얻어 알콩달콩 아들을 둘씩이나 얻은 것까지는 뭐라 할 수 없다. 국법이 보장하는 바 처 외에 첩을 둘 수도 있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다만 정실 부인은 가족의 계보 편성을 주도하며 남편이 후사 없이 죽었을 경우 서자를 배제하고 양자를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확보하는 정도였다. 그렇다면 자산의 부인 김씨(1757~1825)는 아들의 양자를 정해 양육과 교육을 행하면서 새로운 삶을 열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아들 학초가 죽은 마당에 예론을 들먹이며 서자를 끼워 넣으려는 정씨 형제들이 야속했던 것일까.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